기획 완결 우리고장명人명당

<68>광평대군 묘역과 명당발복

입력 2012. 12. 1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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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 기슭에 정남향 혈처 천년 학 알 품는 듯한 산세 후손 벼슬길 잇고 또 잇네


수서 광평대군 묘역의 설경. 도심 속의 소중한 문화재로 뛰어난 후손들이 배출된 명당이다.
묘역 안에 있는 종가. 조선조를 통해 역신(逆臣)이 태어나지 않은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지난봄,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위업을 다룬 TV 사극에 광평대군 이여(李璵·1425~1444)가 극 중 주요인물로 활약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명성당(明誠堂) 광평대군(廣平大君)이 누구인가. 세종과 정비 소헌왕후(청송 심씨·1395~1446) 사이의 다섯째 왕자로 20세에 조졸한 이여가 비중 큰 역사 인물로 조명받기도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산 10-1번지에 있는 광평대군 묘역(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에는 각지의 답사행렬이 쇄도했다. 거기에는 총면적 4만1253㎡(12만5237평)의 드넓은 광수산록에 태조(이성계)의 일곱째 왕자 무안대군 방번(芳蕃·1381~1398) 묘와 함께 광평대군 종문(宗門) 묘소 700여 기(基)가 완벽히 보존돼 있다.

 명당 소문을 듣고 찾아온 탐방객들은 명성당의 19대 종손이 살고 있는 유서 깊은 종가를 둘러보고 종회당(이사장 이의종)에 들러 문중 내력을 알고 난 뒤 광평 후손들의 선조에 대한 외경심으로 새삼 옷깃을 여민다. 과연 명당에 쓴 한 기의 묘가 이토록 왕성한 후손 발복으로 이어짐이 가능한 것이며 역사를 빛낸 수많은 인걸이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출현할 수 있는 것인가.

세종, 자신 빼닮은 광평 가장 총애

 성군 세종은 그의 정비 손인 8대군(大君·문종 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과 후궁 손 10군(君·화의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한남 수춘 영풍) 왕자 가운데 자신을 빼닮아 학문에 열중하고 언행이 조신한 광평을 가장 총애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여는 8세 때 광평대군에 봉해지고 12세에 평산 신씨 신자수(동지중추부사)의 딸과 혼인한 후 그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세종 20년(1438) 북방 경비강화 및 풍속교화를 위해 서울 경재소(京在所)를 두었는데 이때 광평은 함경도 종성을 관장했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민했던 그는 종실 관리부서인 종부시(宗簿寺)를 맡아 종친과 신료들로부터 능력과 덕망을 인정받기도 했다. 세종의 명에 의해 후사가 없는 무안대군 봉사손(奉祀孫)이 되어 그의 묘를 지극정성으로 시묘하자 백성들 간 칭송이 자자했다. 봉사손은 양자로 입후(入後) 되는 것과 달리 제사만 모시는 보학 예법이다.

 현재 6만 명에 달하는 광평대군 후손들은 바다 생선 준치를 먹지 않는다. 파시조 광평이 20세 되던 해 식사 도중 목에 걸린 준치 가시가 화근이 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광평이 요절하자 세종은 크게 슬퍼하며 저자를 문 닫게 하고 수라상을 거부했다. 당시 광평에게는 5개월 된 외아들 영순군 이부(1444~1470)가 있었는데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곧바로 입궐시켜 왕자의 예로 양육도록 했다.

영순군 묘로 천장되며 놀라운 융성기

 초장지 경기도 광주군 서촌 학당리(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예장됐던 광평의 묘가 연산군 1년(1495) 아들 영순군 묘가 있던 현재 묘역으로 천장되면서 광평대군파 문중은 놀라운 융성기를 맞는다. 연산군은 부왕(제9대 성종)의 능을 그곳에 조영하는 대신 당시 국풍에게 어명을 내려 최고의 명당 길지를 잡아주도록 배려했다. 이후 광평대군 묘역은 500년이 넘는 조선 초기 묘제 전통을 지켜 오고 있으며 문화재 전문위원과 각 성씨 문중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광평 묘역은 서울 강남의 대모산을 조산(朝山)으로 앉힌 북동쪽 기슭에 정남향(자좌오향) 혈처를 찾아 왕릉처럼 자리하고 있다. 천년 학이 커다란 날개로 알을 품는 형상의 학익포란형(鶴翼抱卵形)의 산세가 안정감을 준다. 묘와 사당 사이에는 명당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천심수(天心水)가 혹독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샘솟고 있다. 이런 명당에서는 굳이 나경으로 측정 안 해도 풍수법수에 딱 맞아떨어진다.

 명당의 발복은 후손들의 입신양명으로 입증돼야 한다. 현재 광평로로 명명된 서울 지하철 3호선의 수서역과 일원역 일대는 예부터 ‘궁말’로 불리던 지명이다. 영순군의 아들 남천군 청원군 회원군 3형제가 광평 묘역 아래 집을 짓고 살자 인근 주민들이 삼궁(三宮)이라 해 ‘궁마을’로 불렸던 것이 ‘궁말’로 변형된 것이다. 수서가 광평 후손의 근원지가 된 연유다.

조선 과거등과만 115명 달해

 당시부터 전주 이씨 종친은 물론 타 문중에서도 명당에 조상을 잘 모신 덕분이라며 광평 묘역을 자주 찾아 주변 산세와 물형을 살펴 갔다. 이후 조선왕조 500년을 통한 광평 후손의 벼슬길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날리고 있다. 전주 이씨 과거등과자(문과) 850명 중 115명이 광평 문중에서 배출됐다.

 선조 때 대학자 이의건, 효종 때 우의정 이후원, 숙종 때 영의정으로 북한산성 수축을 완료한 이유, 고금석림을 편술한 이의봉, 헌종 때 우의정 이지연을 비롯해 주로 문신들이 대거 출사했다. 한말의 법부대신(주 러시아공사) 이범진, 의병장 이범승, 헤이그 밀사 이위종, 청산리 전투의 영웅(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 초대 서울시장 이범승, 이범준·이규현·이규성·이광표 전 장관도 문중을 빛낸 인물이다.

 광평 묘역 안에는 풍수적으로 깊이 고찰해야 할 귀중한 사례들이 있다. 남편과 외아들을 먼저 여의고 질곡 같은 삶을 살다 73세로 세상 떠난 광평대군의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정1품) 평산 신씨(1426~1498) 묘의 위치다. 일반적으로 묘의 당판에서 볼 때 남자를 좌측에 두고 여자는 오른쪽에 매장하는 남좌여우(男左女右)의 장법과 달리 남자가 우측에 있는 남우여좌(男右女左)의 환장법(換葬法)을 쓴 것이다.

 이 같은 환장법은 먼저 간 망자(광평대군)의 생(을사) 몰(갑자)년과 묻힐 사람(신씨)의 생(병오) 몰(무오)년을 오행둔시법(五行遁時法)으로 역산해 찾아내는 비전의 장법이다. 이 비법을 알고 광평 묘역을 찾아온 풍수지관은 옛 신풍의 열린 신안(神眼)에 탄복하며 광평 문중의 발복 비결을 덕담으로 주고받는다.

 숙종 21년(1695) 세워진 묘역 안 세장기비(世葬紀碑)는 광평의 묘로부터 몇 보(步)를 가면 누구누구의 묘가 있다는 소중한 금석(金石) 기록유산인데 여태껏 별도의 문화재 지정을 못 받고 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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