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의병서

<222>절제방략

김병륜

입력 2012. 11. 2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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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시대비 군사관련 규정 8종 수록


비상식량 확보 등 조선시대 전쟁 대비 노력 보여주는 사료 지역별 4운체제 등 독특한 내용 많아 제승방략 연구 도움

 임진왜란은 연구가 많이 된듯 보이지만 전체적인 전쟁 국면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공백지대가 많다. 개전 초기 조선군의 방어전략 혹은 전쟁지도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와 관련해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체제라는 두 가지 체계의 장단점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하지만 제승방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됐는지, 그 본질은 무엇인지 여전히 모호한 점이 적지 않다.

 조선은 원래 진관체제에 기반을 둔 방어체제를 갖고 있었지만 중종 때의 삼포왜란, 명종 때의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제승방략체제를 새롭게 도입했다는 것이 과거 사학계의 일반적 통설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임진왜란 초기 패전은 제승방략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이 문제는 이미 임란 당시부터 논란의 초점이 된다.

 진관체제는 도 단위의 지휘관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지휘하는 주진(主鎭)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두고 거진의 첨절제사가 그 아래 등급의 제 진을 통할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각 진은 진을 중심으로 자신의 관할구역을 책임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유성룡은 한 진이 무너져도 다른 진이 살아남아 지속적인 방어가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비해 제승방략체제는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本鎭)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는 분군법(分軍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제승방략체제는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는 막을 길이 없는 체계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전시에 해당 지역의 수령 외에 한양에서 지원임무를 띠고 내려온 경장(京將)이 지역 병력 중 일부를 할당받아 지휘하는 것도 제승방략체제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경장이 내려올 때까지 사전 집결한 병력의 통제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장수 없는 병사’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경장 입장에서는 직할 병력 없이 단신으로 다른 지방으로 부임해야 한다는 점에서 ‘병사 없는 장수’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전 당시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면 이 같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기 힘든 대목도 많다. 당시 조선군의 방어체계가 나름 정교하게 작동하는 모습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는 개전 직후에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래성 내부에는 동래부사 송상현뿐만 아니라 경상좌도의 중위장인 양산군수 조영규, 좌위장인 울산군수 이언성의 부대도 같이 주둔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타 지역 부대가 동래성 안에 주둔할 이유는 없으므로 이들 병력은 개전 이후 긴급 증원된 부대로 짐작된다.

 이들이 개전 직후 바로 동래성에 주둔한 것을 보면 경상좌도에 평소부터 위장급 5명을 정해놨을 뿐만 아니라 전쟁 등 중요한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맡을 임무까지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증원부대들이 신속하게 동래성에 집결한 것은 전시에 대비한 체계적인 방어전략 내지 병력출동 지침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진관체제가 일종의 고정 방어체제라면 제승방략을 일종의 기동 방어체제로 평가하면서, 대규모 방어전에는 제승방략이 더 적합한 체제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혹은 제승방략체제를 대규모 전쟁에 적합한 방어체제라고 이해하면서 진관체제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진관체제까지 포괄하는 좀 더 상위의 방어개념이라고 보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제승방략과 관련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사료가 바로 절제방략(節制方略·사진)이다. 육군사관학교와 국민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현대 이후 처음으로 제승방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고 허선도 박사는 이미 1970년대에 절제방략을 처음 발견하고, ‘남도 제승방략의 편린’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이후 추가적인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절제방략은 현재 두 경로로 전승되고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선산부사와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던 정경달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진법에 부록 형태로 실려 있다. 또 하나는 정약용의 제자로 추정되는 정주응이 편집한 책 중에 절제방략이란 제목으로 관련 내용이 수록돼 있다.

 그 내용을 보면 5개 항의 지휘관련 규정을 시작으로 주로 1500년대 중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군사관련 문서 8개로 구성돼 있다. 다시 말해 절제방략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내용은 하나의 완성된 책자라기보다는 병조나 비변사·순변사·감사 등이 제정한 군사관련 규정들을 모아놓은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절제방략에 실린 내용을 보면 각 지역별로 병력을 4개 단위부대(4운)로 제1부대(1운)는 지방관이 직접 지휘하고, 제2·3·4부대는 별도의 영장(領將)을 지정해서 병력을 분할 지휘하도록 돼 있다. 다시 말해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지방군이 모두 4개 단위부대(4운)로 편성돼 융통성 있는 분할 운용이 가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진관체제나 제승방략체제에 대한 설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투 편성과 지휘체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임진왜란 당시 개인 일기를 보면 이 같은 4운 체제에 기반한 병력 운용 내용이 적혀 있어 이 같은 규정이 실제로도 적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절제방략에는 방어사의 파견과 그 지휘관계, 미숫가루나 찐쌀 등 전시에 대비한 비상식량 확보 방안, 무기지급 규정 등 전시에 대비한 여러 규정이 나온다. 이런 규정들은 공식적인 법전이나 역사기록에 누락돼 있는 당시 전쟁 대비 노력의 일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진귀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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