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의병서

<221>기김화백전지전

김병륜

입력 2012. 11. 1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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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부족한 군대도 전술 원칙 지키면 승리 가능”


  1636년 12월 9일 만주족의 청나라군 9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해 왔다. 여기에 청나라에 복속하고 있던 몽골족 3만 명까지 조선 침략에 합세했다. 다름 아닌 병자호란이다.

 만주족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은 평안도 일대에 사실상의 주력부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들 방어병력 대부분은 산성에 포진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 기병과 야지에서 결전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방어하기 유리한 산성에 병력을 배치한 것이다.

 이 같은 조선군의 대응에 청나라는 우회작전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린 것. 거침없이 후방으로 파고드는 청군 때문에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도감 등 중앙군 정예부대와 일부 지방군들이 산성 안에 들어왔지만 병력은 겨우 1만3000여 명에 불과했다.

 국왕의 움직임을 추격한 청군 선봉부대는 이미 16일에 남한산성 부근에 출현했다. 조선 조정이 체계적 대응을 못 하고 당황할 동안 1637년 1월 1일께 청태종이 이끄는 적의 주력부대가 남한산성 부근에 도착했다.

각 지역의 지방군들이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줄줄이 출전했지만 경기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와중에 일부 왕족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됐다.

 설상가상으로 남한산성의 식량이 부족했다. 성 안에 남은 식량으로는 1만3000여 명의 병력이 최대 50일도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도 채우지 못한 1637년 1월 30일 조선은 항복했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처절한 패전의 역사지만 그 참혹한 와중에도 승리의 역사는 있었다. 대표적인 전투가 김화 백전전투다.

1637년 1월 28일 평안도 관찰사(일명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병사) 유림이 지휘하는 5000여 명의 군대가 강원도 김화 남쪽의 산자락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조선군을 향해 청나라군이 공격을 가해 왔다.

 감사 홍명구가 지휘하는 부대는 격전 끝에 전멸했으나, 병사 유림이 지휘하는 군대는 승리했다.

박태보(1654∼1689)는 당시 전투를 직접 목격한 관노 유계홍의 증언을 근거로 조선군이 승리한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유 병사가 임시주둔지의 문을 닫고, 맞서 싸우면서 아군 패잔병과 적군을 들이지 않았다. 적이 이미 홍 감사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유 병사의 진을 공격하려 했는데, 유 병사 군이 화약무기를 일제히 발사했다. 적이 거의 죽어 후퇴하는 자가 적었다. 곧 다시 적이 진격해 왔는데, 탄환을 쏘아 맞추니, 종일토록 (유 병사의 진영이) 함락되지 않았다.”

 이 같은 기록은 박태보의 문집인 정재집(定齋集)에 ‘기김화백전지전(記金化栢戰之戰·사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글이지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승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몇 안 되는 사료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박태보의 기록에 따르면 병사 유림은 일종의 임시 진지를 건설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적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유림의 진영은 산능선을 타고 접근하기 쉽지 않은 언덕에 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

백전전투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남긴 송시열(1607~1689)도 병사 유림이 나무로 만든 급조 요새인 목책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형을 고려해 부대를 배치하고 그에 맞는 야전 축성을 했기 때문에 적 기병의 돌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재차 공격을 가해 왔지만, 유림 병사 휘하의 조선군은 또다시 적을 격퇴했다. 승리의 비결은 엄격한 사격 군기였다.

“적이 또 병사의 진을 향해 돌진하여 곧장 목책 밖 10여 보(步) 거리에 도달하자, 병사의 진에서 수많은 포(砲)를 일제히 발사하니, 적은 일시에 비로 쓴 듯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되었다. 하루종일 이렇게 싸워 적군의 사망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적은 마침내 패잔병을 수습해 달아났는데, 그 수가 처음에 비교하면 10분의 1도 못 되었다.”

 이처럼 유림 휘하의 조선군은 적 기병의 돌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적이 10여 보(12m)라는 근거리에 도달했을 때 집중사격을 가한 것이다.

유림은 이처럼 결정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적에 비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해 그날 저녁 접적을 끊고 전장에서 철수했다.

 후퇴 과정도 탁월했다. 유림은 아군의 후퇴를 은폐하기 위해 조총의 화승을 이용해 일종의 자동사격장치를 만들었다.

화승의 길이로 발사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므로, 사람이 없이도 밤새도록 조총 소리가 나게 장치를 했다. 청군은 총소리를 근거로 조선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고 생각해 추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청군이 발견한 것은 조선군의 텅 빈 진지였다. 병사 유림의 기지 앞에 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박태보는 “이 전투에서 적병의 전사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적이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웠는데 삼 일이나 지나 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군 전사자 시신을 태우는 데 3일이나 걸렸을 정도로 대승리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백전전투는 지형을 고려한 부대 배치, 진지 축성, 사격 군기 등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기본 요소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전투다.

특히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적을 상대하더라도 기본적인 전술 원칙을 충실히 준수한다면 전투 경험이 부족한 군대도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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