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의병서

<217>대열의주

김병륜

입력 2012. 09. 1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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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적 군사 행사는 ‘대열’


국왕·병조판서 직접 참석해 군대 사열·훈련도 참관 “편안할 때 위태로움 잊지 않는다” 의미 담아 시행

“겨울에 대열(大閱)하는 법이 있었던 것은 편안할 때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않은 까닭이었으니 그 생각이 깊었습니다.”

 대열의 의미를 설명한 조선왕조실록의 한 대목이다. 대열은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군대를 사열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행사를 의미한다. 국왕이 직접 참석하는 대열은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군사 의식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대열 외에도 강무, 취각령에도 국왕이 참석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왕이 참석하는 거의 유일하고 대표적인 군사의식 행사 겸 훈련이 바로 대열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위상에 변함이 없었을 만큼 대열은 가장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군사행사였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국군의 날’에 해당하는 행사는 없었지만,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단연 대열을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다. 군 관련 행사 중 가장 비중이 크고, 국가 원수가 직접 참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조선 전기의 대열 관련 규정과 절차는 1454년 완성한 ‘오례 군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련기사 8월 21일자 11면

조선 후기가 되면 군 편제가 달라지는 만큼 대열의 구체적 규정과 내용도 바뀌게 된다. 조선 후기의 대열 모습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한 책은 영조 25년(1749년)에 완성한 속병장도설이다. 매우 중요한 행사였던 만큼 대열의 절차와 내용을 수록한 휴대용 문서철도 만들어졌다. 규장각에 소장된 대열의주(大閱儀注ㆍ사진)가 대표적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대열의주에는 두 종류가 있지만 구체적인 작성 연도는 알 수 없다.

문서에 나오는 군 편제와 규정을 살펴보면 하나는 1755년 이후, 또 하나는 1778년 이후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대열의주에는 행사 전날에 훈련장 부근에 국왕이 머무르는 임시 건물인 주필행전을 설치하는 일부터 시작해 국왕의 가마인 대가가 행전에 도착할 때의 절차, 왕이 갑옷을 입고 사열한 후 환궁할 때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의 대열에는 수도 한양과 경기도 등 수도권 일대에 주둔하는 부대, 다시 말해 5군영만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수도인 한양 안에 주둔하면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훈련도감, 한양 안에 주둔하지만 징집된 병사로 구성된 어영청과 금위영, 징집된 병사로 구성돼 있으면서 북한산성을 방어하는 총융청과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 등이 바로 대열에 참가하는 5군영이었다.

 대열은 각 절차마다 병조판서와 선전관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고 국왕에 시행을 청하면, 국왕이 승인하는 방식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그에 따라 큰 소리로 구령을 외치는 것은 선전관들의 몫이었다.

선전관이 “방신포삼성(放信砲三聲)”이라고 외치면 병사들이 신호용 대포를 세 번 발사하고, “정수명금삼(鉦手鳴金三)”이라고 구령을 하면, 징수들이 금고를 세 번 치는 식으로 나머지 5군영의 장수들과 전체 병사들에게 명령이 전달되도록 했다.

 지휘용 깃발인 교룡기나 초요기를 휘둘러 각 부대 지휘관을 호출하기도 하는 등 실전에서 사용하는 각종 신호방법이 모두 동원됐다.

특히 국왕의 명령임을 증명하는 상징물인 신전(信箭)의 수령과 전달 등 중요 절차에는 국왕의 국방담당 비서관에 해당하는 병방승지가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대열은 크게 보면 국왕이 집결한 각 부대를 둘러보고, 5군영의 최고 지휘관들로부터 신고(참현례)를 받은 뒤, 5군영이 전투대형을 형성하는 과정을 참관하는 것이 행사의 큰 줄기였다.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이란 책을 보면 5군영을 구성하는 각 부대들은 대열에서 사용하는 진형도 각각 달랐다.

 훈련 도감은 원진(圓陣)으로 중앙에 자리잡고, 수어청(守禦廳)은 예진(銳陣)으로 앞에 자리잡았다. 금위영은 직진(直陣)으로 왼쪽에 자리잡고, 어영청은 방진(方陣)으로 오른쪽에 자리잡고, 총융청은 곡진(曲陣)으로 뒤에 위치했다.

때로는 대열의 마지막 단계에서 5군영이 서로 모의전투나 모의 추격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 것은 조선 전기와 유사했다.

 조선 후기의 대열이 열린 장소는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정조 재위 기간 중에는 한강 옆의 노량진에서 시행했고, 순조 때는 현재의 은평구 녹번동에 해당하는 양철평에서 대열을 시행한 기록도 남아 있다. 대병력이 집결하는 만큼 수도 한양에 가까우면서도 성 밖에 일정한 공터가 있는 지역에서 대열을 실시한 것이다.

 대열은 정치적 상징성이 큰 행사인 만큼 대열을 두고 국왕과 신하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국왕 정조는 병조판서가 대열 행사 때 5군영의 대장들을 직접 지휘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해 신하들과 논쟁을 벌인 사례도 있다.

  국왕 영조는 대열 때 장수들이 식양갑을 입지 못하도록 점검하기도 했다. 식양갑이란 겉은 일반 갑옷처럼 생겼지만 갑옷 안에 방호능력에 필요한 철판이나 가죽이 들어가지 않은 갑옷을 뜻했다.

실전에서는 쓸모가 없는 갑옷이었지만 가볍기 때문에 당시 일부 장수들이 식양갑을 입기도 했다. 영조로서는 식양갑을 입은 것은 일종의 군기 문란이라고 생각해 식양갑을 입지 못하도록 단속을 한 것이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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