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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영천지구전투 수훈 조종사 전구서 공군소위

기사입력 2012. 05. 07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57

아군機 유도 적 완전 괴멸 ‘군단의 눈’

위험 무릅쓴 저공 정찰 비행 병력 등 적정보고 임무 완수 愛機와 함께 산화한 참 군인

1927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출생한 전구서 소위(추서계급·1927. 2. 7 ~ 1950. 10. 7·사진)는 평양 제2공립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8월부터 조선항공협회에서 조종사로 활약했다. 1948년 9월에 육군항공기지사령부 항공병 제2기로 입대해 같은 해 11월 이등중사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초 대전에서 창설된 공군정찰비행대는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김천·의성·영천기지로 이동해 적정 정찰과 연락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국군 제1·2군단의 작전을 지원했다. 8월로 접어들면서 포항과 영천지구에 대한 북한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영천기지에는 전 소위를 비롯한 일부 병력만 파견대로 남게 됐다.

같은 해 8월 24일 전 소위는 L-4기로 정찰작전을 수행하던 중 포항 서북쪽의 기계북방 방면으로 침입하는 적 지상군 2개 대대를 발견, UN공군의 F-51 전투기를 유도해 적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1950년 9월 초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작전이 급속히 전개됨에 따라 공군은 정찰비행전단의 정찰기 14대를 육군의 각 군단에 파견, 정찰·관측 및 연락 임무를 부여함에 따라 전 소위는 영천 일대의 적정 정찰을 맡게 됐다.

낙동강 전선의 북측면에서 북한군 제2군단과 격전 중이던 아군 제2군단은 영천지구에서 적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춘 후 적의 동향에 대한 정찰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전 소위는 정확한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적의 대공화력을 무릅쓰고 대담한 저공비행을 시도했다.

소총으로도 피격이 가능할 만큼 속력이 느리고 기체도 보잘것없는 L-4기로 저공비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매우 위험한 조종이었다.

영천 상공을 낮게 선회하던 전 소위는 약 2개 연대 규모의 적 이동병력을 발견, 신속히 보고함에 따라 군단은 즉각 반격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50년 10월 7일 초가을의 하늘은 맑고 높았다. 전 소위는 중부전선을 따라 북진하던 제6사단의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 화천지역 상공에서 관측 비행을 수행하고 있었다. 비행시간이 채 10분도 안 돼 적진 상공으로 진입한 전 소위의 L-4기는 적으로부터 빗발치는 대공화력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도 적정 파악 결과를 신속히 무전으로 보고하는 등 아군 작전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며 관측비행을 수행하던 전 소위의 애기는 안타깝게도 적의 집중적인 대공포화에 피탄되고 말았다. 붉은 화염이 순식간에 엔진 전체로 퍼지면서 서서히 조종간의 기능이 멈췄고 기체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내려다보이는 곳은 모두 산봉우리와 계곡뿐, 활강이 불가능한 기체를 유지하며 착지를 하는 순간에도 전 소위는 동승했던 관측장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불시착을 시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강한 투지와 사명감으로 주어진 정찰임무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전 소위는 그의 목숨 같은 애기와 함께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정부는 6·25전쟁 개전 당시부터 생사를 초월한 군인정신으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숨은 수훈자 역할을 수행한 전 소위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뛰어난 조종실력과 정찰 조종사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스스로 ‘군단의 눈’이라는 자부심을 지녔던 불굴의 보라매, 전구서 소위. 그의 빛나는 전공은 우리 공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박부희(전쟁기념관 국군발전사담당 학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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