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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협상의 명장 서희(徐熙) 장군

기사입력 2012. 04. 09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52

거란의 침공, 외교담판으로 제압하다

서기 993년 거란의 80만 대군 고려 침공 항복 요구 논리정연 서희 주장에 소손녕 반박도 못하고 철수

993년 거란은 80만 명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했다. 전국의 병사를 합해도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던 고려로서는 거란을 막아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거란의 군대가 기병 중심이었다는 점도 보병 위주의 고려 군대가 전세를 장악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해 항복을 요구했을 때, 고려의 여러 대신들이 거란의 요구에 응하고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내어 주자는 할지론(割地論)으로 기울게 된 것도 이러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할지론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바로 거란의 침략을 중군사의 중책을 맡아 막아내야 했던 서희(사진·942~998) 장군이다.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를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영유하고 있는데,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강점하고 있기 때문에 토벌하러 온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화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희는 먼저 거란의 병영에 사신을 보내 회담을 제의했다. 그리고 할지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국왕 성종에게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강약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소손녕의 영문으로 가서 회담을 이끌어 냈다. 그렇다면 서희는 어떤 논리로 불리한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을까?

 서희와 소손녕 두 사람은 드디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먼저 소손녕은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현재 거란이 차지하고 있으니 고구려는 바로 거란의 영토라 이야기했다.

이러한 논리는 오늘날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인데 동북공정은 이를 현재의 ‘영토’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서희는 소손녕이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해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거란이 아닌 고려라는 것이다. 그런 논리로 말하자면 거란의 수도인 동경도 고려에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고려가 거란과 통교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논리정연한 서희의 주장에 소손녕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했다. 결국 거란의 군사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에 여진을 몰아내면서 그곳에 흥화진(의주)·용주(용천)·통주(신천)·철주(철산)·귀주(귀성)·곽주(곽산)가 들어섰다.

 서희가 거란과의 ‘역사전쟁’을 명쾌한 논리로 제압해 고려의 영토를 확장시킨 것을 볼 때, 일본의 역사왜곡이 계속되는 오늘날 우리의 대응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서희 장군에게 지혜를 빌려 보는 것은 어떨까.

<김대중 전쟁기념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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