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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도서 확보전

김병륜 기사입력 2011. 12. 12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28

서해5도를 우리 땅으로… 막강한 해병대의 힘 과시

6·25전쟁 당시 한국 해군의 상륙함이었던 LST 801 천안함 모형. 1세대 천안함이었던 이 군함은 해병대 42중대의 여도 상륙
전과 해병대 41중대의 백령도 확보전을 지원하는 등 맹활약했다. 자료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50년 12월, 그 혹독했던 겨울에 미 해군 제95기동부대(Task Force 95) 사령관 알랜 스미스(Allan E. Smith) 해군 소장은 야심 있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의 구상은 다름아닌 북한 해안의 전략적 가치가 높은 섬을 점령·확보하는 것. 당시 절망적이었던 전황을 고려한다면 스미스 제독의 구상에는 비범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6·25전쟁 당시 한국 해군의 상륙함이었던 LST 801 천안함 모형. 1세대 천안함이었던 이 군함은 해병대 42중대의 여도 상륙전과 해병대 41중대의 백령도 확보전을 지원하는 등 맹활약했다.

 그 무렵 평안북도 청천강 일대의 국군과 미 8군 주력은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북한 전역을 포기하고 고통스러운 후퇴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함경도 일대에서는 미 10군단 예하의 미 해병1사단과 국군 1군단이 흥남 일대에서 해상 철수를 앞두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미 해군과 한국 해군에 부여된 가장 최우선적 임무는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의 안전한 해상 철수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미스 제독은 철수 지원 그 이상의 역할을 놓고 고민했다.

 질적으로는 물론이고 양적으로도 세계 최강, 세계 최대급의 군대였던 미 해군을 단순히 해상 철수를 위해서만 운용하는 것은 그 위력에 걸맞지 않았다. 물론 미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북한 상공을 수시로 드나들며 적을 공격했지만, 그 밖에도 해군이 기여할 몫이 있다는 것이 스미스 제독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전략도서 확보작전’이었다.

 ◆ 작전의 출발점은 원산항 봉쇄

 전략도서 확보 작전의 출발점은 원산항 해상 봉쇄였다. 흥남에서 아군 10만5000여 명과 1만7000여 대에 달하는 차량, 그리고 9만 명이 넘었던 피란민을 철수시키기 위해서는 원산 등 인근 항구도 공산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계속 차단해야 했다.

 원산항 완전 봉쇄를 위해서는 항구 주변의 작은 섬들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 와중에 원산항 부근 섬들 외에 동ㆍ서해안의 전략적 가치가 높은 섬, 다시 말해 ‘전략도서’를 확보하면 아군이 공세로 전환할 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의 구상은 순차적인 검토를 거쳐 태평양함대도 승인했고, 극동사령부의 맥아더 원수나 한국 해군과 해병대도 적극 동의했다. 이런 관점에서 아군이 점령하기로 선택한 곳은 원산항 부근의 섬들 외에 서해안 진남포 입구의 초도, 서해안의 백령도 등이었다. 아군의 구상은 이들 섬을 확보한 후 150~200명 정도의 한국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해상전력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고립된 섬을 꾸준히 방어하는 것은 위험하고도 고독할 것이 분명한 임무였다. 하지만 한·미군 고위 지휘관들은 근성 있는 한국 해병대라면 그 역할을 완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 42중대의 여도 상륙

 흥남철수 작전이 완전히 끝난 후 전략도서 확보작전이 구체화됐다. 1951년 2월 13일 한국 해병대 독립 42중대 선발대가 원산항 앞바다의 섬 중에 가장 동쪽 외곽에 있는 여도에 상륙했다. 다행히 적은 없었고, 한국 해군 상륙함 천안함(LST-801)에서 내린 42중대 본대는 2월 14일 여도를 장악했다.

 여도보다 더 해안에 가까운 섬들은 육지의 적이 상륙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95기동부대사령관 스미스 제독이 미 해군 순양함 맨체스터함(USS Manchester CL-83)에서 지휘하는 가운데 2월 16일부터 2척의 미 해군 구축함이 적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원산항의 주요 목표에 대한 함포 사격을 가했다.

 이 같은 사전 정지 작업 후 신도 점령 작전은 2월 24일 개시됐다. 미 해군 구축함 2척과 호위함 2척은 5인치 함포 350발과 3인치 함포 259발을 사격했다. 압도적 사격 지원을 받으며 한국 해병대 독립 42중대 병력은 여유 있게 신도에 상륙했다.

 42중대는 이어 남쪽의 소도에 상륙, 잠복해 있던 소수의 적을 사살하고 76㎜포 4문과 탄약과 화약 500상자를 노획했다. 42중대는 다음날인 25일 인근 지역 북한군의 야포 사격을 뚫고 대도를 점령했다.

 3월 4일에는 원산항에 가장 가까운 황토도 점령 명령이 떨어졌다. 42중대는 이날 오후 2시 30분 피아간의 사격이 교차하는 가운데 황토도에 상륙,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 해군 천안함과 도서상륙전   

 전략도서 상륙작전 중 첫 번째 작전인 여도 상륙전을 성공적으로 지원한 한국 해군 천안함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건조된 미제 전차양륙함이었다. 이 군함은 원래 미 해군 소속 LST-659함으로 레이터상륙전 등 태평양의 격전지를 누볐다.

 1949년 7월 우리 해군이 인수해 함번을 LST-801함, 함명을 용화함으로 정했지만, 곧 천안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천안함은 6·25전쟁 중 육군 17연대 옹진 철수작전, 전략도서 확보 작전 등 중요 작전에 참가한 후 1959년 4월 퇴역했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가 지난 2010년 3월 북한의 도발로 침몰한 호위함(PCC-772) 천안함이 제2세대 천안함이라고 할 수 있다면, 6·25전쟁 당시 전략도서 상륙전에서 활약한 해군 상륙함(LST-801) 천안함은 제1세대 천안함이었다.  

 ◆ 41ㆍ43중대의 잇따른 전과

 1951년 3월 서해안 전략 도서 확보 작전이 시작됐다. 교동도·백령도·석도 등이 목표였다. 동해안과 달리 서해 전략도서의 경우 아군 정보부대와 해군부대 등이 이미 주둔 중인 경우가 많았다. 즉 이들 지역에 해병대를 투입하는 것은 상륙 점령 개념이 아니라 전략도서를 보다 계속 굳건히 확보하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3월 28일 해군 LST-801 천안함을 타고 출동한 해병대 41중대는 4월 2일 교동도에 상륙했다. 교동도 방어태세를 강화한 41중대는 4월 23일 백령도에 진입했다. 당시 백령도에는 육군과 해군의 정보대, 미 육군 항공대 등 우군 병력이 주둔 중이었지만, 해병대 중대가 진입함에 따라 방어 태세가 더욱 강화됐다. 5월 7일에는 북한 서해 진남포에서 30㎞, 평양에서 70㎞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동강 하구의 석도를 점령했다.

 이후 41중대는 소규모 기습 상륙을 감행해 적 후방을 수시로 공격하는 한편, 피란민을 기반으로 한 반공유격대 활동을 지원해 북한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다.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큰 전과를 올리자 1951년 8월 28일 동해안에 해병대 43중대를 추가 투입해 명천군 앞바다의 양도를 기습 점령했다.

 1952년 1월 18일에는 서해 초도에도 해병대가 상륙했다. 이후 동서 해안의 전략도서를 장악한 한국 해병대 독립중대들은 수시로 감행되는 적의 중대ㆍ대대급 상륙작전에 맞서 격렬한 보병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섬들을 굳건히 사수했다.

  ◆ 해병대의 힘

 한·미 해군 함정과 해병대 3~4개 중대를 동원해 이뤄진 전략도서 확보 작전의 성과는 컸다. 아군 함정은 아군이 확보한 전략도서를 기반으로 적 해안을 더욱 완벽하게 봉쇄했고 좀 더 안정적으로 적 해안을 공격했다. 한·미 해군 함정들은 1951년 6개월간 5만 발의 함포 사격으로 원산항 일대를 강타했다.

 또한 전략도서들은 북한 내륙 및 해안지역에 추락한 아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발판이 됐다. 서해안 초도에 설치된 레이더는 아군 항공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큰 전과는 적 해안에 막대한 병력을 묶어 뒀다는 사실이다.

 미 해군연구소(Naval Institute)에서 출간한 ‘한국전쟁해전사’는 원산 상륙을 막기 위해 운용했던 적군 규모를 7만9200명으로 추산한다. 동해안에 실제 배치된 아군 해병대는 2개 중대 수백 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미 해군력을 바탕으로 그보다 수적으로 100배가 넘는 적을 묶어 둔 것이다.

 서해안에도 수만 명의 적 병력이 아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배치됐다. 해군과 해병대의 힘이 결합됐을 때 직접 상륙전을 감행하지 않아도 지상전의 흐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 화려한 시너지 효과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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