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 두목서 唐 수장으로 후계구도 정리 중 이세적 전면 부상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인 용문석굴. 북위시대에서 당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됐다. 이곳의 재불동을 태종의 차남 이태 |
당 태종 이세민과 그의 큰 아들 이승건이 마주 앉았다. 폐태자가 된 큰 아들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의 열기가 가슴에서 눈으로 올라갔다. 눈시울이 촉촉이 젖었다. 정적이 흐르다가 이승건이 말을 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저는 단지 태자 자리를 지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태가 저를 태자에서 밀어내려는 술책을 부리는 바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좋지 않은 신하들이 음모를 꾸미도록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태를 태자로 삼으시면 그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폐태자 이승건이 동생 위왕 이태를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비극은 이태를 노골적으로 총애했던 태종 자신에게서 배태됐다. 죄책감이 태종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태를 태자로 세우면 자신이 아들 간에 싸움을 붙여 그렇게 만든 것이 된다.
이승건을 귀양 보내고 허전한 마음에 태종은 양의전으로 갔다. 많은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태종이 도착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장손무기, 방현령, 이세적(李世勣), 저수량을 제외한 모든 관리들이 밖으로 나갔다. 태종의 아들로 진왕의 자리에 있었던 이치도 그 자리에 남았다.
당 태종의 얼굴은 검은 빛을 띠었고, 괴로운 표정이 역력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떨어질 것 같이 온 힘을 다해 말을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의 세 아들과 한 동생이 한 짓이 이와 같으니 나의 마음은 진실로 의지할 곳이 없소.”
당 태종의 한 마디 말은 643년 비극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세 아들은 장손황후 소생인 장남 이승건, 차남 이태 그리고 후궁 소생 이우를 말한다. 이승건과 이우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태는 태자가 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한 동생은 태자의 반란 모의 주모자로 드러나 자진한 이원창이다.
태종은 침상에 몸을 던졌다. 신하들이 얼른 뛰어와 태종을 부축했다. 그러자 태종의 손이 자신의 착용하고 있는 패도(佩刀)에 닿았고 칼날이 자루를 빠져나왔다. 칼끝이 태종의 목을 향하려는 순간 저수량이 칼을 빼앗아 이치에게 주었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동정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그리고 방현령은 태자를 낙점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했다. 황제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이치 태자 책립을 완고하게 주장했던 장손무기는 이태가 태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질이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이태를 밀고 있었던 방현령도 당 조정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신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치는 음흉한 이태가 태자가 되어 보위를 이으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걸고 태종이 이태를 총애한 것이 비극의 원인이라고 직간했던 저수량과 이치가 병주도독으로 있을 때 그 휘하에 장사(長史)로 있었던 장군 이세적은 무사하지 못하거나 실각할 것이다.
방현령을 제외하고 모두 이태가 아니라 이치가 태자가 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자식들과 동생들의 꼴을 한탄한 태종의 그 말 가운데는 이치가 빠져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장손무기가 태종에게 폐하가 바라는 것을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태종이 말했다. “나는 진왕(이치)을 세우소 싶소.” 장손무기가 대답했다.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다른 논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이 바라건대 그를 목 베게 하여 주십시오.”
이태를 생각하고 있던 방현령은 의외의 결정에 놀라 눈알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사나운 성격의 장손무기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당 태종이 사망하기 6년 전의 일이었다. 이 결정은 향후 동아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치가 태자가 될 수 있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장손무기는 막상 이치가 황제(고종)로 즉위한 뒤에는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고종 치세에 이세적이 밀어올린 측천무후에 의해 제거된다. 최대의 수혜자는 당 고종 시대 군부의 수장이 되는 이세적이었다.
이정(李靖)이 노쇠한 당시 그는 당나라의 장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세적이 군사적으로 세운 공은 모두 상관인 이치의 것이기도 했다. 이세적이 당 고종시대의 당나라 군부 수장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연이 주효했다.
이세적은 어릴 적에 밑바닥 생활을 했다. 그는 일개 도적단 졸개에서 출발했다. 현 하남성 활현 동부 출신인 그는 수말 내란기 17살의 나이에 범죄조직의 들어갔다. 적양(翟讓)이라는 사람의 휘하였다. 616년 10월 어느 날 이세적은 두목에게 제안을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지금 동군(東郡)은 저와 두목의 고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아 약탈하기가 민망합니다. 형양(滎陽 : 하남 정주)과 양군(梁郡)은 변수(卞水 : 대운하 합류점)가 지나가는 곳이니, 지나가는 배를 위협하여 상인을 약탈하면 스스로 충분히 밑천을 삼을 수 있습니다.”
이세적의 제안을 받아들인 적양은 형양과 양군 두 군의 경계로 들어가 수나라 정부의 배와 민간 상인들의 배를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수로의 중요한 요지인 그곳을 장악하고 많은 물자를 얻었다. 그러자 적양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이 늘어나 1만 명에 이르렀다. 적양은 대도적단의 두목이 되었고, 수나라 타도를 외치던 이밀(李密)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세적과 이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613년 이밀은 수나라 양제를 섬겼으나 그가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고 대야심가 양현감(楊玄感)을 도와 반란을 일으켜 양제의 2차 고구려 침공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혁명에 실패하고 천신만고 끝에 하남 기현의 협객 양수재의 집에 숨어 살았다. 반란의 불길이 치솟자 적양 등 도적을 규합해 황하와 낙수(水) 교차점에 세워진 낙수창(水倉)을 점령했다.
이후 남방에서 올라오는 비축물자를 손에 넣게 된 이밀은 세력이 급속히 성장해 독립정권이 됐다. 기아의 무정부 상태에서는 곡물만 있으면 어떤 사람도 부릴 수 있었다. 당시 군웅 중의 하나인 태종의 아버지 당고조 이연도 이밀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밀은 낙양을 공격하다 수양제가 보낸 왕세충(王世充)의 구원군의 공격을 받고 단 한 번 패배로 근저에서 붕괴됐다. 이밀은 부하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해 인연이 있던 당고조 이연에게 투항했다. 그 가운데 이세적도 있었다. 이밀은 대우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꾀해 도망하려다 체포돼 처형 당했다.
상전을 잃은 이세적이 이연에게 이밀의 시신을 거둬 장사지낼 것을 요청했다. 그것을 가상히 여긴 이연이 이세적을 발탁해 장군으로 삼았다. 그는 본래 서세적(徐世勣)이었는데 이때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발탁된 그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태종 이세민의 선봉장이 되어 군웅 송금강을 격파해 산서지역을 회복하게 했고, 다른 군웅들을 제압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세적은 626년 당태종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권을 차지하는 현무문의 변을 일으킬 때 중립을 지켰다. 그것은 태종과 이세적 사이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군사적 천재였던 이세적은 당 제국의 버팀목이었다. 그는 630년 돌궐을 제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무장 가운데 하나였고, 641년 돌궐을 대신해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설연타를 그가 직접 격파했다. 태종이 “그 옛날 이세적이 있었다면 만리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세적의 전면 부상은 7세기 중후반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644년 그는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는 데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655년 당 고종 대에 측천무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660년 당군의 백제 침공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그가 당군을 지휘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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