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요충지 낭비성에서 전세 역전시켜
포천의 반월산성. 낭비성이었던 이곳은 연천·철원에서 현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전투는 언제나 일어났던 |
전쟁이 언제나 시작되는 가을이었다. 629년 8월 김유신은 아버지와 함께 북방으로 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고구려 비성군(臂城郡 : 포천)의 낭비성(娘臂城)이었다. 유신은 만 36세였다. 평균 수명이 40세 이하였던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년을 훌쩍 넘겼다.
유신은 당시까지만 해도 전장에서 공을 세우지 못해 이름이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서도 공을 세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유신은 김해 금관가야의 왕손이었다. 532년 증조부인 구해왕이 나라를 들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했다. 조부인 김무력은 구해왕의 손에 들려 김해에서 신라의 왕경으로 왔고, 진골(眞骨)에 의제적으로 편입됐다.
구해왕의 3남인 김무력은 유능한 무장이었다. 552년 한산정의 초대 사단장이 돼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서울의 한강유역을 빼앗았다. 이듬해 옥천 관산성에 출동해 백제 성왕과 장군 4명을 포함, 병력 3만을 전멸시켰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지키는 데 있어 김무력은 최대의 공헌자였다. 조부의 공훈이 없었다면 김유신 집안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 김서현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정다감했고 무엇보다 어머니를 평생 연인으로 모셨던 양부(良父)였다. 어머니는 고귀한 피를 갖고 태어났다.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이었고, 당시 국왕이었던 진평왕은 5촌 당숙이었다.
아버지는 그 덕에 합천지역의 대량주도독으로 하주정 사단장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624년 백제 무왕이 지리산을 넘어왔을 때 그것을 막기 위해 출동했지만 싸워 보지도 못하고 사단을 물렸다. 당시 김유신은 아버지 아래에서 장교생활을 했으리라.
김유신은 신라 왕족의 피를 받았지만 그의 집안은 여전히 ‘가야 개뼈’로 통했고, 진짜 뼈인 진골(眞骨)들에게 대접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했기에 차별은 가중됐다. 칼을 든 고구려·백제군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진골 귀족들이었다. 김유신은 자신이 이번 전투에서 공을 꼭 세울 것이라 다짐했다.
낭비성 공격을 위한 신라군 사령관은 어머니의 또 다른 5촌 당숙인 김용춘이었다. 김춘추의 아버지인 그도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로서 한 많은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진골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이 이번 전투를 책임지게 됐다.
왕경에서 20일 걸려 도착한 낭비성은 포천 분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산 정상부에 반월 모양으로 수축돼 있는 낭비성은 고구려가 임진강을 도하하지 않고 동쪽으로 우회해 철원에서 서울 방면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산성에서 40㎞ 떨어진 곳이었다. 신라가 백제 무왕의 총공격을 받고 남강유역을 상실할 즈음 낭비성이 고구려에 넘어갔다. 고구려 군대를 막아내는 최대의 방패였던 낭비성이 이제 신라의 한수지역 총사령부인 북한산성을 위협하는 비수가 됐다. 그것을 뽑아야 신라의 한수유역 지배가 안전해진다.
낭비성은 현 포천시의 반월산성이다. 해발고도 283m, 동서 490m, 남북 150m로 동서가 길다. 주변에 구읍천 등 4개의 하천이 흘러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성 내부에는 문터가 2개, 치성 4개소, 건물지가 6개, 우물과 물이 빠져 나가는 수구지가 2개 있다.
김유신 일행의 군대가 한강을 건너 북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물자와 병력을 보충받기 위해서다. 북한산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김유신 일행은 의정부 방면으로 향했다. 행군하는 그들의 모습이 관측됐는지 고구려의 봉수대에서 연기가 올라갔다. 낭비성 앞에 도착했을 때 고구려 군대가 성문을 열고 나와 있었다. 신라군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깊은 참호가 파여 있었고, 바로 그 뒤에 정연하게 목책을 세워 놓았다. 준비가 된 고구려군의 사기는 높았다.
세에 눌린 신라군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역력했다. 김유신은 이대로 전투가 시작되면 신라군에 많은 희생자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결정권자가 아니었다.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용춘이 사령관이었다. 1급 근친왕족인 그는 왕실 산하의 기관들을 관리하는 총지배인으로 재정가이며, 다리를 놓고 사찰을 세우는 건축가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총기를 잃은 진평왕이 터무니없는 인사를 단행했다. 왕의 4촌 동생으로 친숙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용춘이 아는 것은 전군 앞으로 전진밖에 없었다. 신라군이 성 앞에 만들어진 참호와 목책으로 다가가자 준비된 고구려군은 하늘의 빛을 가릴 정도로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 댔다. 대열을 짓고 전진해 가던 많은 신라군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 갔다.
신라군의 대열에 균열이 생기자 고구려군이 목책의 문을 열고 나왔다. 고구려군은 기세가 꺾인 신라군을 공격했다. 불리한 싸움을 하던 신라군은 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물러났다. 신라 전군에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싸울 투지도 사라졌다. 그들을 다시 고구려군을 향해 전진시킨다면 전멸할 것이 뻔했다.
‘삼국사기’는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게 했다. 고구려군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 편(신라)이 불리해 죽은 자가 많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절망이 엄습하자 신라군 지휘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 모두가 무슨 대안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는지 서로를 쳐다봤다. 많은 피를 흘린 후에야 김유신에게 발언의 기회가 왔다.
사단본부 직속대대, 중당(中幢)의 당주인 김유신이 투구를 벗고 아버지 김서현 앞으로 갔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이 상급 지휘관 가운데 하나인 아버지에게 한 말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 군사가 패했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갖고 살겠다고 기약했으니, 전쟁에 임해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라의 병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김유신은 휘하의 직속 기병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향했다. 고구려군들도 그들이 설마 곧장 돌격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유신과 그의 기병들은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참호를 뛰어 넘은 김유신과 그의 기병들은 목책을 돌파했고, 고구려의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김유신은 적장들만을 주로 노렸다. 목을 베고 장수의 깃발을 뽑았다. 그들은 신라군과 성 안의 고구려군이 보라는 듯이 이렇게 적진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3번 반복했다. 눈앞에서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고구려군의 기세가 꺾였다. 대열을 곧바로 정비한 신라군은 북을 치며 전진했다. 겁에 질린 고구려 병사들이 산 정상의 성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신라군에 저항하려던 고구려군도 동료들이 성 안으로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힘이 빠졌다. 한꺼번에 모두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신라군은 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5000명의 목이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고, 1000명이 포로가 됐다. 성(城)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고구려군도 넋이 나갔다. 저항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그들은 모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낭비성을 함락시킨 직후 신라는 철원평야까지 차지했고, 고구려군을 한탄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려 충선왕 5년(1279)에 국통의 존호를 받았던 고승(高僧) 무외(無畏)가 철원 고석정(孤石停)에 진평왕이 비석을 세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비석에 김유신의 공훈이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김유신이 이후에도 제대로 등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12년이 지난 642년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신라가 존망의 위기에 몰리자 김유신은 다시 등장한다. 당시로서는 노인이 된 48세의 나이였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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