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아름다운영웅김영옥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117>취재기 ⑶

입력 2011. 06. 2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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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김영옥은 이시대 진정한 영웅


미국인들은 국가나 지역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피를 흘린 사람들을 영웅으로 부르며 길이나 건물에 이들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사진은 200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교한 김영옥중학교.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인의 이름을 딴 중학교다.

 그렇지만 아무 영향력도 없는 기자가 그것도 미국에서 한글로 발행되는 신문에 아무리 기사를 쓴 들 현실적으로 그것이 미국이나 태평양 건너에 있는 한국 또는 일본에 무슨 그리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겠는가.

 그래서 위와 같은 네 가지 문제에 부분적이나마 답을 줄 수 있는 삶을 산 실존 인물을 찾아 그의 삶을 제시하는 편이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이에 따라 나는 실존 또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재미동포들로 명단을 만들고, 위의 네 가지 문제에 답을 들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한 사람씩 이름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름을 지우지 않으려면 네 가지를 전부 충족시켜야 했다.

 첫째, 미국에 뚜렷이 공헌했을 것.

 둘째, 한국에 뚜렷이 공헌했을 것.

 셋째, 한미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

 넷째, 나아가 한일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

 필자는 교육도 한국에서 받고 군대생활도 한국에서 했기에 당연히 한국 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과 미국은 다른 것이 여럿 있었다. 어떤 것은 한국이 낫고 어떤 것은 미국이 나았으며, 어떤 것은 낫고 못하고 할 것 없이 그저 서로 많이 달랐다.

 영웅에 대한 개념과 대우도 다른 것인데 이 점은 한국이 본받아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미국은 타인의 업적을 흔쾌히 인정하고 대접하는 사회로 영웅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잘 정의된 개념을 갖고 있다.

 미국에는 영웅이 많다. 영웅적인 미국인이 많아서라기보다 미국인들이 영웅을 많이 만들고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누가 돈을 많이 벌어 거부가 됐다거나 나아가 사회에 많은 기부금을 내놓는다고 해서 좀처럼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반면에 강도를 쫓다가 목숨을 잃은 경찰관, 9·11테러 같은 때 순직한 소방대원, 전장에서 숨져간 일등병, 순직한 CIA나 FBI 요원 같은 이들에게는 쉽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여 동상을 세우기도 하고 길이나 건물에 이들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국가나 지역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피를 흘린 사람들인데 그들이 굳이 대통령이나 장군이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 뚜렷이 기여한 인물을 찾을 때에도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피를 흘린 인물이 우선적 고려 대상이었다.

 이 기준들에 입각해 이름을 지우다 보니 명단에 남은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김영옥이었다.

 기자는 짧은 인터뷰를 통해 수십 년에 걸친 타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이해하는 훈련을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훈련이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옥 이야기를 쓰기로 한 필자는 효율적 접근을 한답시고 ‘잔머리’를 썼다. 그가 전쟁영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필자는 물었다.

 “지금까지 무공훈장을 몇 개나 받으셨습니까?”

 “모르겠군. 집에 가서 세어 보고 알려 주지.”

 필자의 질문은 각각의 훈장 뒤에 뭔가 재미있는 무용담이 있으려니 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군인이 자기가 받은 무공훈장의 개수도 모른다고…?’

 필자는 직업적으로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렇게 믿지 않을 다른 이유가 없어 일단 그의 얘기를 받아들였다. 몇 차례 다시 만난 다음 다시 물었다.

 “훈장은 세어 보셨습니까?”

 “잊어버리고 세어 보지 못했군.”

 그때 필자는 그가 자기 훈장을 세어 보고 내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렸다. 이미 그때쯤은 그가 어떤 인품의 소유자인지 많이 알아가고 있을 무렵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라스베이거스 교외에 있던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대부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으나 그때는 잠시 그곳으로 거주를 옮겨 있었다.

 그의 집으로 들어간 필자는 잊지 않고 훈장이나 상장 같은 것을 보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봤으나 훈장도 상장도 아무 것도 전시돼 있는 것이 없었다. 훈장은 고사하고 그가 군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다. 할 수 없이 필자는 다시 물었다.

 “훈장은 어디 두셨나요?”

 그러자 그는 필자를 데리고 차고로 가더니 구석에서 라면상자 같이 좀 두꺼운 누런 종이상자를 가리키며 그 상자를 자기 앞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그 상자는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듯 뽀얗게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필자가 상자를 옮기자 그는 상자를 열라고 했다. 상자는 작은 케이스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작은 케이스들 역시 아무도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듯 빛이 바랜 채 먼지로 덮여 있었다. 필자가 제일 위에 있는 케이스를 끄집어 내 먼지를 털고 열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것은 은성무공훈장이고….”

 그때 필자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그에 대한 취재는 그때까지 필자가 생각했듯 ‘효율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취재에 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처음 그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가 2차대전의 전쟁영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해방의 주역이었고 피사 해방의 장본인이었다. 로마 해방전에서 보여준 담대함과 용기는 UPI 통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피사 해방전에서는 제갈공명을 무색하게 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피사를 해방시킨 후 연합군 최초로 피사의 사탑 꼭대기까지 올라간 장본인이었다. 프랑스에서 브뤼에르 전투를 치를 때는 적군의 생명까지 아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놓기도 했다.

 취재를 시작할 때는 그가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그가 있었다는 사실이나 한국을 위한 그의 모든 공헌을 확인하는 것 역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국의 휴전선이 현재의 모습으로 생기게 되는 데도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이다. 1951년 5월 38선 이남에 형성돼 있던 당시 중부전선이 60㎞나 북상한 것은 그가 이룬 불패신화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이 같은 업적은 그가 홀로 이룬 것은 아니며 당시 전선에서 함께 피를 흘렸던 모든 국군 및 유엔군 장병들, 이름 한 자도 남기지 못하고 숨져 간 전몰장병들, 대다수 한국인들이 아직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한국인 노무부대 노동자들이 함께 이룬 것이다.

 6·25전쟁 당시 최전방 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돌봤던 사실도 묻혀진 역사의 조각이었다.

 한국군 군사고문 시절에는 한국방어 계획을 대대적으로 현대화하고 이 과정에서 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기도 했고, 오늘날 청와대 경호부대나 수도방어사령부의 태동에도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그의 애착이 묻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취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는 사실 제대 후 그의 사회봉사활동이 결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절반은 그곳에 있으나, 다만 독자들의 권태를 피하기 위해 간략히 썼을 뿐이다.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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