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때 드러난 길 따라 공격 왜구 소탕
중국 연안을 휩쓸었던 왜구의 배. |
척계광 영정. |
척계광을 기념하는 중국우표. |
이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고, 항주에서 절강 서쪽을 지나 안휘성 남쪽을 짓밟은 다음 남경에 육박했다. 그 후 또다시 표양·무석·소주 등지에 상륙해 절강·안휘·강소의 3성을 짓밟으면서 80여 일에 걸쳐 4000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만행을 저지른 왜구의 병력이 겨우 100명 미만이라는 사실에 명나라는 충격을 받았다. 이 정도의 병력에 중국 남부 성들이 유린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명나라가 부패하면서 국가방어체제가 무너져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가정황제 후반에 이르러 부패한 관리들을 쫓아내고 청렴 강직한 대신들이 중용되면서 왜구토벌이 시작됐다. 왜구토벌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척계광이다.
등주 지방 주둔군의 참모장으로 군대 생활을 시작한 척계광은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해 절강지구 사령관에 임명됐다. 절강에 부임한 척계광은 장병들 가운데서 가장 용맹한 자를 선발해 맹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용맹하다는 이 부대도 왜구와 전투가 벌어지자 겁을 먹고 포위한 왜구들을 다 놓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군대의 과감한 개편이 없이는 왜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로 강한 군대가 필요했다. 1559년 가을 척계광은 절강성 의오현 사람들 3000명을 모집했다. 그는 이 3000명으로 새로운 부대를 편성해 맹훈련을 실시했다. 이 부대는 조국과 백성을 위해 싸운다는 결의에 차 있어 그 사기와 전투력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척계광은 이들 장병을 엄격한 규율로 다스렸다.
둘째는 전술이었다. 왜구는 중국 사람들이 가장 겁내는 무기인 일본도와 조총이 있었다. 그는 왜구의 전술과 공격 방법을 무력화시키고 승리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는 왜구를 상대하는 데 자신이 고안한 ‘원앙진’을 채용했다. 원앙진의 구체적인 전술은 이러하다. 우측의 5각 방패를 가진 병사는 이미 잡은 위치를 확보, 자기 부대의 진형을 안정시키고, 좌측의 원형 방패를 가진 병사가 포복으로 전진해 방패 너머로 창을 던져 숨어 있는 적을 유인해 낸다. 적을 유인해 내면 뒤에 있던 병사 둘이 낭선으로 그들을 쓰러뜨리고, 긴 창을 가진 병사들이 덤벼들어 적을 찔러 죽였다. 최후미의 당파를 소지한 병사 둘은 분대의 후방과 측면의 경계를 담당했고, 필요하면 공격으로 전환했다.
셋째로, 군사저작인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책을 써서 척가군의 효율적인 전투능력을 배가시켰다. 이 책에는 병사 배치의 기본 원칙, 군기와 군호(軍號), 전략과 훈련 계획, 군대 내부의 예절, 군법회의의 규칙 등이 들어 있다.
척계광이 거느리는 척가군은 왜구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척계광은 전력이 가장 강하고 잔인했던 왜구의 본거지였던 황서도를 공격하기로 했다.
황서도는 육지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해군력이 강한 왜구에 비해 수군이 약했던 명나라는 조그만 섬이었어도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서도를 공략할 비책을 찾던 척계광은 이곳이 조수 간만의 차가 높아지는 때면 썰물 때 섬까지 땅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다가 갈라져 땅이 드러나도 바닥이 진흙과 뻘로 이뤄져 왕래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닷물이 갈라져 땅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시기와 시간을 파악한 후 모든 병사에게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마른 풀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드디어 바다가 갈라지면서 땅이 드러났다. 척계광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마른 풀을 짊어진 병력들이 물에서 드러난 진흙탕과 뻘에 마른 풀을 깔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꿈에도 섬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왜구들은 대비조차 못 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고 이 섬에 주둔하던 왜구 2600명 전원이 소탕되고 말았다.
가장 악랄하고 공격력이 강했던 황서도의 왜구가 토벌되자 인근의 왜구들은 쉽게 소탕됐다.
1566년 마침내 척계광이 이끄는 척가군은 중국을 괴롭히던 왜구를 토벌하는 데 성공한다.
[Tip]척계광의 탁월한 리더십-엄정한 신상필벌로 최상의 전투력 발휘
척계광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가장 큰 요인을 병사들로 보았다.
첫째, 그는 병사들의 사명감과 자부심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둘째, 개인기보다는 팀워크를 강조했다. 아무리 공을 세웠어도 왜구를 공격하는 원앙진에 문제가 됐다면 처벌했다. 셋째, 둘째 아들의 처형을 명할 정도로 엄격하고 공정한 신상필벌을 시행했다. 넷째, 그는 위험한 공격에도 직접 참가했다. 그리고 총사령관으로서 그의 병사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부하들의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이끈 척가군은 어떤 어려운 전투에서도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했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현대의 야전지휘관들도 척계광의 리더십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일 년 삼백육십 일간 나는 항상 병기를 손에 쥐고 말 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나라와 백성을 끔찍이 사랑한 척계광의 말이다.
그는 가정황제부터 융경황제까지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왜구를 물리친 그의 뛰어난 애국심을 숭앙하면서 민족영웅으로 받든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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