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 전면에서 활약해 운명도 복잡
내몽고 사자왕기 부근의 사막에 쌍봉낙타들이 서 있다. 서기 630년 이곳에서 당나라의 이정 장군은 사막을 건너 도주하던 |
635년 토욕혼 전쟁에서 당나라의 이정(李靖) 장군은 거의 완벽한 군사적인 성공을 거뒀다.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을 장악해 향후 사산조 페르시아와 인도로 가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당나라 군부 내부의 후유증이 있었다. 당태종은 계필하력과 설만균 사이에 일어난 돌궐인과 한인(漢人)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봉합했다. 하지만 한인 내부의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명령하달과 수행 사이에서 손발이 맞지 않았고 서로 불신이 싹텄다. 그것이 대토욕혼 전쟁의 총사령관 이정의 모반 무고사건으로 비화됐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민주(岷州 : 감숙성 민현)도독이자 염택도(鹽澤道) 행군총관인 고증생(高甑生)이 군대를 이끌고 기일보다 늦게 도착하니 이정이 이를 조사했다. 고증생이 이정을 한스럽게 여겨서 이정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했는데, 조사해 보니 그러한 상황이 없었다. (635년) 8월 17일 고증생이 사형에서 감형돼 변방으로 귀향을 갔다.”
고증생은 당태종이 왕자였던 시절 이정과 함께 막하의 진왕부에 있었던 자다. 이정은 모반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수모였다. 부하들과 가족들이 모두 관에 소환돼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했고, 이정의 가깝고 먼 집안 사람들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정의 재산 상황이 어떠한지, 그가 어디에 지출을 해 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모든 것이 밝혀졌다. 사생활도 들춰졌으리라.
이정은 만천하에 홀딱 벗겨진 몸으로 한동안 서 있어야 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 이정은 집에 들어앉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자신은 당(唐)이란 나라 건국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절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당의 건국을 저지하려고 했던 수나라의 충직한 관리였고, 거대한 역사에 무력한 개인에 불과했다.
615년 45세의 이정은 마읍군승(馬邑郡丞)이 돼 당태종 이세민의 아버지인 이연(李淵)의 부임지와 인접한 지역에서 근무하게 됐다. 둘은 돌궐의 침공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고, 함께 돌궐과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당시 수나라는 전국적인 반란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정은 이연이 반란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수양제에게 고발하기 위해 양자강 남으로 향했다. 전란에 길이 막혀 장안에 머물렀다.
617년 이연이 장안성을 점령하자 사로잡혔고 이연은 이정을 즉시 처형하려 했다. 이정은 위축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공이 의군을 일으킨 것은 천하의 폭란을 없애기 위함인데 큰일을 하려 하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장사(將士)를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이연의 아들 진왕 이세민이 그를 살려주기를 청했다. 이연은 그를 풀어 주고 이세민 휘하에 두게 했다. 그는 진왕부(秦王府)의 삼위(三衛)로 임명됐다.
이정은 619년 소선(蕭銑)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기주(夔州)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소선의 군사에 막혀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은 이정에게 감정이 많았다. 이를 듣고 이연은 협주자사 허소(許紹)에게 명해 이정을 처형하라 했으나, 허소가 청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후 그는 더 많은 공을 세워야 했다. 620년 이정은 만족(蠻族)의 추장 염조칙(苒肇則)을 처단했으며, 621년 양자강 강릉에서 소선(蕭銑)의 항복을 받아내 강남 땅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정이 이듬해 영남에 도착해 많은 세력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96주를 함락시키고 호구 60만 호를 획득했다. 623년 보공석(輔公石)이 반란을 일으키자 교주로 나가 진압에 참여했다.
626년 4월 20일 산서성과 연하성 그리고 감숙성 일대를 노략질하던 돌궐의 힐리칸과 이정이 영주(靈州 : 영하성 청동협) 부근에서 마주쳤다. 이정과 돌궐기병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아침에 시작해 오후 4시쯤 끝났다. 양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돌궐의 힐리칸은 이정과 그의 군대와는 장기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철수했다.
이정은 돌궐의 침공에 대비해 이후에도 영주에 계속 주둔했다. 그때 장안에서 이세민은 그의 형제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앞두고 있었다. 이세민과 그 휘하의 신료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장손무기는 이세민에게 선제공격을 하라고 했다. 위지경덕도 역시 그러했다. 그는 이세민이 자신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초야에 숨어버리겠다고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왕(이세민)의 좌우에 머물러 살다가 손을 엇갈려 묶여 가지고 죽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세민은 결정을 미루고 천리 밖에 있는 영주대도독 이정에게 사람을 보내 물어봤다. 하지만 이정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양했다. 형제를 죽이려는 태종의 결단에 끼고 싶지 않았다. 이세민은 이정의 진중한 행동을 보고 오히려 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진왕부에 있던 신료들 가운데 일부는 이정을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었다. 자신들은 목숨이 오가는 정변 직전의 궁정에 있는데 변방의 천리 밖에서 이정은 뒷짐을 지고 있지 않은가.
626년 6월 3일 이세민과 그의 휘하들이 단 한나절 만에 쿠데타를 완벽하게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정은 거사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세민이 당태종으로 즉위한 이후 가장 혜택을 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로 말하면 국방부장관인 병부상서에 임명됐다. 이세민이 집권해 일신된 당제국 군부의 최고 수장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돌궐이 천재지변과 내분으로 쇠약해진 630년 이정은 총사령관이 돼 돌궐을 침공했다. 2월 8일 정예 기병 1만을 선발해 돌궐을 습격했다.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 이정은 자신의 제자 소정방(蘇定方 : 592~667)과 휘하의 200기병을 선봉에 서게 했다. 돌궐군은 소정방이 자신들로부터 7리 떨어진 곳에 와서야 알았지만 늦었다. 힐리칸은 도망치고 이정이 본대를 이끌고 돌궐군을 공격하니 돌궐군이 모두 붕괴됐다. 돌궐군 1만을 죽였고, 남자와 여자 10만과 가축 수십만 필을 약탈했다.
휘하 1만과 함께 도망간 힐리칸은 사막을 건너려다 적구(?口 : 내몽고 사자왕기)에서 기다리던 이세적(李世勣)군에 잡혔고, 주변 부락 5만 명도 모두 항복했다. 이정은 당의 영토를 음산의 북쪽에서 대사막까지 넓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정의 생애 최고의 절정기였다. 하지만 그에게 질투의 화살이 날아왔다. 감찰기구의 수장인 어사대부 소우(蕭瑀)가 이정을 탄핵했다. “이정의 군사들이 돌궐을 멸망시킬 때 힐리칸의 천막 궁정을 습격해 진귀한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그는 이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당태종도 당황했다. 법도가 없는 약탈은 분명히 군율을 위반한 것이다.
하지만 돌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전쟁을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긴 군부의 수장을 처벌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자비한 약탈은 군대의 대열을 흩어 놓게 하고 기강을 무너뜨리는 독약이 아닌가. 누군가 처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군부의 수장인 이정을 벌주면 군대 전체의 사기가 저하된다. 적당한 희생자들이 선택됐다. 그들 가운데 이정의 심복인 소정방이 끼여 있었다. 630년 5월 직후 젊고 유망했던 장교인 그가 군복을 벗었다. 이 사건은 당제국 군부의 미래를 내다보고 인재를 키워 왔던 이정을 한풀 꺾어 놓았다.
5년 후 이정은 공을 세워 소정방을 복직시키려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635년 토욕혼 침공에 자청해 책임을 맡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하지만 모반을 계획한다는 무고를 당했고, 심복인 소정방을 복직시키려는 염원은 수포로 돌아갔다.
소정방은 젊은 시절 27년 동안 백수로 지냈고, 초췌한 노인이 된 657년에 다시 등용된다. 무직 상태였던 젊은 시절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던 근 70세의 노인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13만 대군의 사령관이 된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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