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광대한 영토'와 `고난의 전쟁' 상속받다
북한산성 성벽이 북한산 능선 위의 험준한 지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603년 진평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한산성을 구원 |
632년 1월 신라를 54년 동안 다스렸던 진평왕이 죽었다. 그는 덩치가 장대했다. 하지만 결코 둔중하지 않았다. 성숙한 남자였고 참고 기다리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불행이 그를 진중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왕위가 약속된 아버지 동륜태자가 일찍 세상을 떴다. 572년, 아버지를 잃고 모든 것을 잃었다.
왕위는 삼촌인 금륜에게 돌아갈 것이고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황태자의 아들일 때 모든 사람은 그를 경이롭게 바라봤다. 하지만 한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떠나갔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어머니 만호부인을 말없이 바라봐야만 했다. 조부인 진흥왕이 살아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다. 삼촌 금륜이 진지왕으로 즉위한(576년) 후 진평은 눈치를 봐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삼촌은 주색(酒色)을 밝히는 방탕아였다. 도화녀라는 유부녀를 좋아했고 소문이 온 왕경에 퍼졌다. 삼촌은 밤마다 광대들을 데리고 놀았고 국가와 왕실의 의례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진평왕은 삼촌을 보고 배운 것이 아주 많았다. “저렇게 하면 안 되지.”
삼촌의 방탕이 극에 이르자 내물왕의 후손으로 구성된 진골귀족회의인 화백이 소집됐다. 화백의 회장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를 병합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영웅 거칠부였다. 그는 진흥왕의 조부인 지증왕의 직계비속은 아니었지만 왕족들 내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왕족인 진골 귀족들은 백성들이 왕의 행실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것은 왕실의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실이 권위를 잃으면 통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금 진지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우리 내물왕가의 권위 상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진지왕의 폐위가 결정됐다.
삼촌이 폐위되는 모습을 본 진평왕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내심 기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언제든지 진골 귀족들에 의해 왕좌에서 끌어내려질 수 있다. 진골 귀족들의 손에 떠밀려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심사를 살펴야 했고, 무엇보다 내물왕계 각 가문의 수장들에게 예를 차려야 했다. 그는 권력이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낮춤으로써 쟁취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의례에 충실했다. 왕은 신라국가와 내물왕계 왕실의 제사장이다. 그것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는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의례의 기본은 서열이다. 왕실 구성원 앞에 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높고 낮은 서열이 있다. 그것은 진평왕이 스스로 왕실 구성원의 우두머리라고 자청하는 것과는 달랐다.
신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가 하늘의 위임을 받은 대리인이라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국왕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왕과 중신들이 주역이 되는 의례를 정기적으로 집행하되 그것을 미학적으로 채색할 필요가 있었다. 의례의 집행은 국왕의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신장 11척의 거구인 진평왕은 의례를 박력 있게 잘 집행했다. 교사(郊祀)와 종묘(宗廟)에 제사 지낼 때 진평왕이 허리에 두르던 옥대를 사람들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진정으로 믿음을 주는 의례 주관자의 모습이었다.
큰딸 덕만(선덕여왕)이 왕성인 반월성에서 태어났다. 580년 말에서 590년대 초반 사이가 아닌가 한다. “어째서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당시에는 딸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를 전후한 589년 중원의 강자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멸하고 통일을 달성했다. 이는 수나라가 북방의 강력한 유목제국 돌궐(突厥)을 격파한 결과물이었다. 수의 중국 통일은 후한말(後漢末) 이후 근 400년간의 분열을 종식한 것이었다. 중국대륙의 분열 상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중국의 통일 상태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중국의 왕조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수의 통일로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성장과 전성기 구가는 한제국(漢帝國)의 몰락과 중원의 분열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고구려는 북중국이 강력한 북위에 의해 통일됐을 때도 북방초원의 유목제국 유연(柔然)과 손잡고 또 남조 유송(劉宋)과 연결해 사안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나라가 북방초원의 새로운 유목제국 돌궐을 격파하고 남조를 병합했다. 이제 고구려는 중국에 대해 손을 쓰기 힘든 처지가 됐다.
한편 진평왕도 통일제국 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이미 594년에 수 문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진평왕을 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했다. 아마 이 시기부터 수는 고구려 공략을 위해 신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백제가 신라의 발목을 잡았다. 10대의 예민한 나이였던 덕만은 602년에 백제가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가는 길목인 현 운봉면의 아막성을 공격했고, 귀산이 여기서 아버지 무은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했다고 들었다. 603년에 고구려가 신라의 서북방 중요 군사거점인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성은 고구려군에 포위됐고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진평왕은 북한산성을 직접 구원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위험한 전쟁터로 가는데 딸의 인사가 없을 수 없다. 덕만은 전쟁터로 출발하는 아버지를 배웅하면서 소중한 이를 잃을 수도 있는 아주 무서운 것임을 깨달았다.
행군에 20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북한산성은 잘 버티고 있었다. 진평왕이 직접 구원하러 왔다는 사실을 안 북한산성의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갔다. 병사들이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성문을 열고 나와 고구려군을 공격할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군은 북산산성의 신라군과 신라왕의 구원군으로부터 협격을 받을 것이다. 고구려 장군 고승은 철군 명령을 내렸다. 진평왕은 왕으로서 진정 할 일을 했다.
신라의 영토 팽창은 진평왕의 조부였던 진흥왕대에 정력적으로 추진돼 560년대에는 그때까지의 신라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됐다. 진평왕은 조부로부터 방대한 영토도 물려받았다. 하지만 고난에 찬 전쟁도 물려받았다. 신라는 진평왕대에 가서 실지 회복을 꿈꾸는 고구려·백제 양국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덕만은 신라에 대한 일본·백제·고구려의 협공이 동시에 시작되던 시기에 10대 초·중반을 보냈다. 그녀는 이때 결혼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랑은 음(飮) 갈문왕이었다. 갈문왕이란 칭호는 왕의 형제에게 수여하는 것이었다. 덕만에게는 삼촌이 둘 있는데 국반(國飯)과 백반(伯飯)이었다. 음(飮)은 반(飯)과 비슷한 글자다. 그렇다면 덕만은 15살 이상인 두 분의 삼촌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반은 4촌인 진덕여왕(647∼654)의 아버지다. 그렇다면 백반이 덕만의 배필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삼촌이 신부가 나이가 들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결혼 의식이란 친정 아버지가 모시던 조상신과 결별하고 남편이 모시는 조상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삼촌과 근친혼을 한 덕만의 경우 자신의 친정 조상신과 결별할 필요가 없었고 지참금을 갖고 갈 필요도 없었다. 왕궁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에서 삼촌의 거처로 옮겨갔을 뿐이다.
삼촌과의 결혼은 신라왕실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덕만의 증조부였던 진흥왕은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조부였던 동륜태자는 아버지 진흥왕의 동생, 고모 만호부인과 결혼해 진평왕을 낳았다. 진평왕도 아버지 동륜태자의 동생으로 보이는 복승갈문왕의 딸 마야부인과 결혼해 덕만을 출산했다. 거듭된 근친혼은 왕가의 권력 독점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순수한 성골 왕손 피는 열성 유전인자의 누적을 의미했고 그들을 절멸로 내몰았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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