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병영의추억

<45>개그맨 김종석

입력 2011. 03. 1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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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인생 군대서 결정… 최고 MC로 인정


인터뷰를 위해 전화했던 날, 개그맨 김종석은 박사 김종석으로서 학위 수여식을 빛내고 있었다. 이미 한 대학의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도 아이들을 위한 공부는 끝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그의 아이 사랑은 지극 정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기만으로 조목조목 따져본다면 어린이 친구들에게 있어 동방신기나 소녀시대, 빅뱅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어린이들만의 아이돌인 것이다. EBS ‘모여라 딩동댕’에서 뚝딱이 아빠로 20년을 살아온 그를 대학로의 한 공연장 객석에서 만났다. 새로운 코너를 짜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네며 후배 사랑 또한 남다른 모습을 보여준 김종석. 그는 세상을 사랑하는 No.1 개그맨이었다.
상병 때 김종석.

 

군 생활 중 격려차 방문해 주신 남보원(가운데) 선생님과 함께.
2002 한일 월드컵 때 이다도시와 함께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던 중 한 컷.

1980년 3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개그맨 김종석. 광주에 위치한 31사단으로 입소한 뒤 육군5사단에서 진정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한 그는 보병의 의무를 다하던 중 유쾌한 행복 바이러스맨이라는 끼를 감추지 못하고 문선대로 옮기게 된다.

결국 28개월 군 생활 동안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유쾌, 상쾌, 통쾌의 3대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는 그는 막연한 두려움에 군기 바짝 들어 있던 훈련병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냈다.

훈련소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다리가 부러진 비둘기 한 마리를 키웠다며 그 비둘기 덕에 두려움은 서서히 안정감으로 바뀔 수 있었다고 한다. 훈련병들은 보통 군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의 계기로 인해 큰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 육군에게는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자대배치받자마자 더플백을 채 벗어 놓기도 전에 대대 웅변대회에 참가했거든요. 특기가 웅변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겁니다. 중대·연대·사단·군단 대회까지 나가야 했습니다. 결국 군단 웅변대회 2위. 하지만 자대배치받고서 웅변대회 나가느라 바빴고 대회가 끝나자마자 4박 5일 포상휴가가 주어졌으니 생활관에서 절 보는 시선이 좋을 리 없었죠. 휴가를 마치고 들어가면서 닭튀김에 족발까지 한가득 샀는데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1박 2일 얼차려를 받아야 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얼차려 받고서 먹을 걸 사왔다고 겨우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젠 왜 늦게 말하느냐며 또 얼차려 받고…. 그 당시에는 벌벌 떨며 세상 종말 온 것처럼 두려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추억의 책장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네요.”

 결국 문선대로 차출된 김종석은 GP 근무를 마치고 아침 일찍 돌아오는 군인들을 위해 일명 해장쇼라는 코믹한 공연을 선보이는 12명의 멤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북한이 내려다보이는 위압감, 심신이 지쳐 있지만 바짝 긴장해 있는 전우들의 경계심에 눌려 첫 공연을 제대로 망쳐버렸다고 한다.

물론 얼차려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차려 받는 모습을 보다가 기절해 버렸다며 크게 웃는 그는 이미 주어진 임무이니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건물 옥상 빈 공간을 찾아낸 후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고 개그 공부를 시작했으며 휴가 나와서는 종로 화신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개그쇼를 몰래 녹음해 3개월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는 김종석.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을 결코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며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으니 그의 도전의식과 집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결국 역대 최고 MC라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연대·사단 행사마다 차출돼 갔지요. 공연은 늘 인기 최고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그맨으로서의 인생을 그려보게 됐답니다. 제 인생에서 군 생활은 인생의 길을 열어준 시기였던 거죠. 당시 서용석 상병과 함께 더블 MC를 봤는데요, 저도 그렇고 그 친구도 그렇고 제대 후 개그맨 시험을 봤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개그맨의 길을 함께 걷지 못했습니다. 둘 다 개그맨이었으면 최고의 명콤비로 이름을 날렸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그런데 제가 군대 내에서 최고의 스나이퍼로 인정받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 당시 시력이 양쪽 다 2.0이었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돼 있었으니 사단 주최 사격대회에 나가서 늘 만점을 받는 거예요. 하지만 스나이퍼 김종석보다는 최고 MC 김종석 타이틀이 제게는 더 걸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꼼수를 써야 했지요. 일부러 과녁을 피해 쏘고. 정말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찰나였답니다. 물론 후회는 없습니다.”

 군 복무기간을 이처럼 알차게 보낸 대한민국 육군병장이 있을까 싶다. 그는 군대에 있으면서 수첩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을 써뒀다고 한다.

‘한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의 근심을 면하리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경험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생생한 조언이었다. 힘든 것, 힘들지 않은 것은 결국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 힘들어도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다며 현역 장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했다. 그러고 나면 결국 스스로가 깨닫고 생활관이 이해해주는 위대한 탄생이 이뤄진다며 꼭 실천해 보길 당부했다.

또 훈련 중엔 나라를, 휴식 중엔 자신을 위해 시간을 배분할 줄 아는 자기계발의 달인이 돼야 한다는 지혜도 함께 건넸다. 마지막으로 공기 좋은 곳에서의 규칙적인 청정의 생활을 마음껏 누리라며 그것 또한 인생을 위한 놀라운 혜택이라고 강조, 또 강조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정말 철학을 품고 사는 예비역이 삶에서 건져 올린 따스한 가르침 그 자체였다.

■ 김종석 개그맨은
MBC 3기 공채 개그맨. 1988년부터 EBS 딩동댕유치원을 진행했으며 ‘뚝딱이 아빠’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유니세프 친선대사인 오드리 헵번과 로저 무어를 만난 뒤 봉사에 더 큰 뜻을 갖고 굿네이버스를 비롯해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 중.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행사를 비롯해 다양한 국가 행사 전문 MC로 활약했으며 ‘웃음의 달인’ 등 다수의 책 출간. 현 서정대학교 유아교육과 부교수.

<조기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iammaximus@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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