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고대동아시아세계대전

<7> 돌궐에 붙은 군웅들

입력 2011. 02. 2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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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나라> 건국 초 돌궐에 저자세 외교로 생존


몽골고원은 세계 최대 최량의 대초원이다. 수많은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는 이곳은 돌궐을 비롯한 유목제국의 ‘요람’의 땅
이었다. 과거 흉노ㆍ선비ㆍ유연ㆍ돌궐 등 이름을 남긴 유목제국은 여기서 태어났다. 필자제공

 

 617년 이연은 반란의 명분을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기를 쳤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위해 징발을 단행한다는 가짜 칙서를 꾸미고 격문을 뿌렸다. ‘자치통감’은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원(산서 태원), 안문(산서 대현), 삭주(산서 사주시)의 백성 가운데 나이가 스무 살 이상, 쉰 살 이하의 사람들을 다 병사로 만들어 연말에 탁군(북경)에 모아서 고구려를 칠 것을 기약하니,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흉흉하고 반란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고구려 노이로제는 반란이란 기관의 연료였다. 가짜 칙서를 꾸민 장손순덕과 유흥기 등은 모두 고구려 전쟁에서 도망해 이연의 품으로 숨어든 탈영자들이었다. 이연의 참모인 그들은 그 전쟁을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원의 어느 반란군 지도자보다 강한 세력을 보유한 돌궐 칸과 협상을 맺어야 했다. 줄을 서는 군웅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연도 돌궐과 경쟁적으로 손을 잡으려고 했던 군웅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군웅들은 이연이 몸을 일으키기 이미 4개월 전에 돌궐에 경쟁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유무주ㆍ양사도ㆍ곽자화 모두 돌궐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소 꼬리털 깃발(纛)을 하사받았다.

 617년 3월 분양궁(산서 영무현)을 차지한 유무주는 수나라 조정의 궁녀들을 잡아서 돌궐 실필 칸에게 상납했다. 입이 벌어진 실필 칸은 상당한 전마를 그에게 하사했다. 분양궁은 당시 수의 관리였던 이연의 관할 구역이었다.

 수조정으로부터 벌을 받을까봐 노심초사했던 이연이 반란을 일으킨 5월 17일, 돌궐이 그의 관할 지역인 진양(섬서 태원)을 약탈했다. 이연은 숨어 구경만 했고, 6월 5일 그는 약탈자 실필 칸에게 군사를 청하는 편지를 썼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군웅들에 대항하기 위해 전마가 필요했고, 돌궐만이 여유분의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7일 후 긍정적인 대답이 왔고, 이어 돌궐 칸이 서신과 1000필의 전마를 보내왔다.

 칸이 내린 서신을 받는 자리에서 이연은 개처럼 기었고, 돌아가는 돌궐 사신에게 상당한 뇌물을 상납했다. 칸의 심사에 따라 돌궐 칸은 유무주를 시켜 이연의 본거지인 진양을 당장 점령할 수도 있었다. 이연은 유무주와 돌궐 칸에게 충성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또 이연은 사신을 파견해 자신이 장안을 점령하면 획득한 모든 전리품을 돌궐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나아가 자신이 중원을 장악하면 매년 돌궐에게 조공을 바칠 것이고 그것이 돌궐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자치통감’ 617년 7월 6일 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도 장안에 입성한 징표로 토지와 백성은 이연이 갖고 금ㆍ옥ㆍ비단은 돌궐에게 돌리겠습니다.” 돌궐 칸은 내란에 휩싸인 중국을 착취했고, 군웅들은 칸의 세리(稅吏)였다.

 8월 15일 돌궐 칸이 이연에게 500명의 기병과 2000필의 전마를 보내왔다. 당 나라의 성공적인 건국과 장안 장악에 돌궐의 원조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연은 무시무시한 폭력배에게 급전을 내썼다. 대가는 너무나 커 이자에 이자를 붙여 두고두고 갚아야 했다.

 얼마 후 돌궐 칸은 군웅 설거를 거느리고 오원(내몽고 五原)에 와서 군대를 집결시켰다. 당장 장안으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겁먹은 이연은 사신을 보내 막대한 뇌물을 주고 굽실거렸다. “저희가 알아서 정기적으로 금은보화를 바치겠으니 이렇게 수고롭게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618년 5월 17일이었다. 장안의 궁궐 태극전에는 고구려악(高句麗樂)을 비롯한 중국 주변 9개국의 음악(九部樂)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최고의 상석에 돌궐 칸의 친척 아사나골돌록과 당 고조가 앉아 있었다. 돌궐 사절 단장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치른 연회였다. 그들이 초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조는 돌궐 칸에게 바칠 아름다운 여자들을 치장해 보냈다. 당시 돌궐은 최강국이었다. 동쪽 거란과 실위에서 서쪽 토욕혼과 고창국까지 지배하고 있었고, 북중국의 수많은 사람들도 전란을 피해 돌궐에 들어가 있었다. 기마궁수 100만을 보유하고 있는 돌궐 칸은 당고조를 포함한 중국의 모든 군웅들을 ‘똘마니’ 대하듯 했다.

 619년 초 돌궐의 시필 칸이 죽고 당 고조 이연의 부의가 늦어지자 돌궐이 당장 장안을 박살낼 기세였다. 겁먹은 당고조는 당장 엄청난 패물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4월에 유무주가 돌궐 기마병과 함께 산서성 유차시를 함락시켰다. 패물이 적다는 뜻이다.

 6월에 가서 돌궐 사신이 장안에 와서 다시 정식으로 실필 칸의 사망을 알렸다. 그러자 고조 이연은 장안성의 동문(長門)에 실필 칸의 빈소를 크고 화려하게 차리고 곡을 하는 의식을 성대하게 치러야 했고, 4일 동안 조정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그동안 장안의 모든 관리들은 돌궐사절이 머물고 있는 관(館)에 가서 조문을 해야 했다. 물론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 돌궐은 애도의 정(情)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물질을 원했다. 고조도 비단 3만 단(段)을 내놓아야 했다. 효과는 정말 잠깐이었다. 8월에 돌궐은 양사도와 함께 섬서성 연주를 노략질했다. 9월 21일에 돌궐의 사신이 장안에 와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서돌궐의 갈살라 칸을 내놓으라고 했다. 갈살라는 돌궐, 즉 동돌궐과는 원수관계였다. 고조에게 충성했던 그를 넘긴다는 것은 인간으로 참으로 못 할 짓이었다. 협박에 겁을 잔뜩 먹은 고조는 시간을 끌다가 연회를 마련했다. 취한 갈살라는 돌궐 사자에 인계됐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620년 5월 돌궐은 왕세충과 결혼동맹을 맺고, 그에게 1000필의 전마를 줬다. 9월 21일 당 고조의 아들 이세민이 왕세충과 전투를 벌이다 기병에 포위돼 죽을 뻔했다. 앞서 2월에 돌궐의 칸, 처라가 수왕실의 양정도를 수왕(隋王)으로 봉했다. 백관의 신하들도 주었고, 중국사람 1만 명을 다스리게 했다. 돌궐은 장안의 본래 주인인 수 왕실의 사람들을 앞세워 언제든지 당나라로 쳐들어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10월 돌궐의 처라 칸이 죽었다. 저번과 같이 당 고조는 장락문에서 곡을 하고 부의로 엄청난 비단을 내놓았으며, 그의 모든 신하들은 돌궐 사절을 찾아가 조문을 하고 예물을 바쳐야 했다. 처라의 뒤를 이어 동생인 힐리 칸(621~630)이 계승했는데, 그는 고조의 통치 기간과 태종의 초기에 걸쳐 당 왕조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황상(당 고조)은 중국이 아직 편하지 아니하여 돌궐에게 아주 후한 대접을 하였는데, 힐리 칸이 요구하는 것에는 만족함이 없었고, 말씨도 교만하였다. 갑술일(10월 26)에 분음(산서 만영 영하진)을 노략질하였다.”

 당 고조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돌궐에 뇌물을 바쳤다. 그리고 당의 영토를 침입하지 말 것과, 당 조정에 반란하고 돌궐의 신하를 자처하는 군웅들을 원조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돌궐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해 왔고, 북방의 여러 군웅들과 연합해 당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천하의 영웅 이세민도 돌궐의 위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624년 장안까지 쳐들어온 돌궐 칸에게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를 보였던 당태종 이세민의 변명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성문을 닫고 지키면 돌궐은 반드시 군대를 풀어 크게 약탈할 것이니 (나는) 이를 제어할 수 없다. (중략) 돌궐과 싸우면 손해가 막심할 것이며, 내가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중략) 금과 비단을 (돌궐에) 주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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