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다시쓰는6·25전쟁

<22>국군의 지연전

김병륜

입력 2010. 07. 1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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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병력·장비 열세 딛고 잇따라 쾌승


 1950년 7월 지연전 당시 철수하는 한 국군부대 장병들의 모습.  철모조차 착용하지 못한 국군의 모습이 언뜻 초라해 보이
기도 하지만, 장비가 부실한 악조건 속에서도 국군은 지연전 기간 동안 뚜렷한 전과를 거뒀다.                        자료사진

6·25전쟁 당시 육군 병사들의 표준화기였던 M1 소총.                                                                        자료사진
 
 1950년 7월 미군과 국군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지연전을 펼쳤으나 전선은 점차 후방으로 물러나기만 했다. 7월 3일 한강선이 돌파되면서 서부전선은 딱히 적당한 방어선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7월 4일에는 수원마저 함락됐다. 이에 앞서 7월 2일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했다. 특히 강릉을 방어하던 8사단이 영월-제천 선을 따라 내륙으로 철수하면서, 동해안의 방어선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7월 5일부터 미 24사단을 비롯한 지상군이 한국에서 방어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유일한 희망의 불씨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미 24사단이 평택에서 대전까지 축차적으로 방어선을 형성해 혈전을 치를 동안 국군도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쳤다.

 당시 국군은 미군에 비해 장비가 부실했고, 초전의 피해로 사단급 부대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3000~8000명 수준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다. 객관적 조건으로 보자면 국군의 지연전에서 커다란 전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지연전 과정에서 미군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미군을 능가하는 탁월한 전과를 거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50년 7월 6~7일 충북 음성 북쪽 외곽에서 벌어진 동락리 전투와 7월 17일과 20일 경북 상주 화서면에서 벌어진 화령장 전투가 대표적이다.

 

 ▲ 동락리 전투

 개전 초반 북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던 6사단 7연대는 7월 초 원주에서 장호원을 거쳐 충북 음성으로 이동하던 북한군 15사단 예하 연대급 부대를 기습 공격, 섬멸에 가까운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이 같은 동락리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설이 별로 없으나 전투 경과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6사단 7연대 2대대장과 예하 중대원들은 1960년대에 남긴 증언에서 “동락리를 마주보는 644고지에 배치돼 있다가 7월 7일 오후 4시쯤 망원경으로 관측 중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북한군 1개 연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 전투의 시초”라고 설명한다. 이후 “대대장의 독단으로 동락국민학교 외곽으로 이동해 5시에 기습 공격을 가해 북한군을 전멸시켰다”고 전투 경과를 설명한다. 혹은 주민의 신고로 북한군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7연대가 2대대의 독자적인 작전이 아니라 연대의 지휘 아래 2ㆍ3대대가 함께 참가한 조직적인 전투의 결과라는 증언도 있다. 7월 6일 동락리 부근에 주둔하던 6사단7연대 3대대가 일시 철수한 후 원 진지 부근으로 복귀했으나, 이를 완전 철수로 오인한 북한군이 경계 대책도 없이 차량 탑승 상태로 이동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는 것이 증언의 요지다.

 3대대가 신덕 저수지 부근에서 북한군 차량 대열에 기습 공격을 가할 때, 마침 2대대도 동락리에서 북한군의 차량 대열을 포착해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이 밖에 위 두 가지 증언과 유사하나 시간이나 사건의 선후 관계, 세부 줄거리에서 약간씩 차이가 나는 증언들도 많다.

 이처럼 전투 경과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엄청난 전과를 획득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15사단 예하 연대 군수참모를 포함한 132명을 포로로 잡고 구경 122㎜ 곡사포 6문을 포함한 각종 포 54문, 장갑차 10대와 각종 차량 60대 등 많은 장비를 노획했다. 북한군이 남기고 간 전사자의 시신만 1000여 구에 달했으며 급하게 도주하다 버리고 간 권총과 소총은 2000여 자루에 달했다. 이 전공으로 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 화령장 전투

 북한군은 7월 중순 소백산맥 일대에서 국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북한군 1사단과 15사단은 보은과 문경 사이의 간격을 통해 소백산맥을 돌파하려 했다. 국군 8사단은 안동 북쪽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남하를 대비하고 있는 중에 17연대도 보은 ~ 상주 사이의 25번 도로를 따라 7월 17일 상주 화령장에 도착했다. 17연대가 수도사단에서 2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된 데 따른 부대 이동이었다.

 선발대로 이동했던 국군 17연대 1대대는 화령장 도착 직후인 17일 아침 주민들로부터 “북한 부대가 상주방면으로 남하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날 11시 무렵,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 중인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면서 주민들의 제보가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북한군 1개 대대는 이미 남하했고, 북한군 후속부대도 곧 화령장에 도착할 상황이었던 것. 1대대는 병력을 배치하고 적의 출현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날 오후 4시쯤 북한군 15사단 48연대 예하 병력이 출현했다. 마침 북한군은 아군이 배치된 곳의 정면인 송계국민학교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을 취했다. 국군 17연대 1대대는 이날 19시30분 북한군이 경계병도 제대로 배치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자 기습적인 공격을 시작, 적을 격멸했다. 사살한 적만 700여 명에 달하는 대승이었다. 18일에는 17연대 수색대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북한군 전령을 또 생포했다. 이들은 북한 15사단장이 48연대에 보내는 전령이었다. 북한군 전령을 통해 북한군 45연대가 뒤이어 이동해 온다는 첩보를 입수한 17연대는 예하 2대대를 투입해 매복에 나섰다.

 19일 화령장에서 봉황산 동쪽 능선을 넘어 동관리 일대에 17연대 2대대 예하 중대들이 배치됐다. 이날 17연대 2대대는 우마차로 보급물자를 운반하는 북한군의 보급 수송대를 포착해 섬멸했다. 국군 17연대 지휘부는 아군이 북한군 전령을 여러 차례 생포하고 보급 수송대도 공격한 만큼, 북한군이 작전 노출 가능성을 고려해 공격계획을 변경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생각보다 미련했다. 21일 17연대 2대대 배치 지역에 북한군 15사단 예하 전투부대가 또다시 진입해 왔던 것. 매복 중이던 국군 17연대 2대대는 북한군을 기습 공격해 356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했다. 소총·박격포·기관총 등 노획한 화기류만 2.5톤 차량 3대에 가득찰 정도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 결과 북한군은 상주지역으로의 진출이 지연돼 문경지역에서 후퇴 중이던 국군 2군단 퇴로를 차단하려던 최초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으며 국군은 낙동강전선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17연대는 4일간의 매복작전 간 거의 매일 북한군의 전령이나 포로를 잡아 완벽하게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상태에서 연속적인 매복작전에 성공했다. 이 전투로 아군은 낙동강 방어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됐으며, 17연대 전 장병도 1계급 특진이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 유엔군 창설과 국군 재편성

 1950년 7월 북한의 공격 속도를 늦추기 위한 지연전이 한창일 때 국군의 지휘권과 부대 구조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는 제3차 결의를 통해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 따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사령부(FEC : Far East Command)가 유엔군사령부 기능을 겸하게 됐다. 14일에는 미 8군사령부가 정식으로 대구로 이전해 유엔군 지상군을 지휘하게 됐다. 그 직후인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서한을 보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공식 인계했다. 순수하게 작전적 관점에서 볼 때 지휘권 통일의 이점이 컸을 뿐만 아니라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보다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지휘권 이양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를 전후해 우리 군은 육군의 재편성 작업을 진행했다. 7월 5일 정식으로 문서화된 육군 재편계획에 따라 한강방어전을 지휘하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육군1군단으로 개편돼 우리 군에 처음으로 군단급 부대가 탄생했다. 7월 12일에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치던 6, 8사단을 지휘하기 위해 국군 2군단이 새롭게 창설됐다.

 재편성 과정에 대해 당시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은 “한 곳에 머물러 재편성할 시간이 없었고, 집결을 명할 통신수단도 없었다”며 “구두로 전달해 행군 방향을 알려 부대나 장병들이 저절로 모여드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 일이 있다. 백 장군은 “걸어가면서 부대를 재건하는 상황이었다”며 “그러나 이상하게도 병력이 모여줬으니 그러한 마음가짐이 사단의 전력이었다”고 회고한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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