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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후퇴하고도 승리한 장진호 전투

입력 2010. 01. 1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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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혹한과의 싸움서 승리 … 철수작전 성공


1950년 12월 함흥·흥남 철수작전 기록 사진.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해병1사단 병사 사진.
장진호 전투를 기록한 마틴 러스의 책 ‘브레이크 아웃’.

 “추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동료들. 그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던 일. 피가 나오자마자 곧 얼어붙어 버리는 지독한 맹추위. 눈 덮인 벌판에 끝도 없이 널려 있던 중공군의 시체. 차라리 죽어 버리면 이 고통을 잊을까 했던 추위 속에서의 중공군과의 혈투….”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Break out : ‘돌파’라는 뜻)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1950년 말 함경남도 장진호(長進湖) 부근에서 미 해병 1사단이 5배 이상의 병력으로 공격하는 중공군 포위망을 돌파해 후퇴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인 마틴 러스는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해병대원이었다. 그는 직접 보고 체험했던 전투 경험과 수집한 이야기들을 실록소설 형식으로 기록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맥아더는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자 미 해병 1사단을 다시 원산에 상륙시킨다. 미 해병 1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했다. 워커 중장이 이끄는 미 8군은 평양을 거쳐 북진하고,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10군단은 장진호 일대를 거쳐 북상해 북한군을 협공하겠다는 것이다. 오늘 소개하는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 전투에 관한 것이다.

 맥아더는 미 해병 1사단으로 하여금 장진호 서쪽으로 진격해 평양을 거쳐 북진하는 미 8군과 합류해 북한을 통일한다는 작전계획을 갖고 있었다.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 도착할 무렵 중공군은 장진호 지역에 9병단 소속 12개의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을 섬멸하려던 중공군의 계획은 날씨 때문에 틀어지고 말았다.

 이 해의 겨울은 빠르고도 매우 춥게 다가왔다. 11월 10일에는 차가운 북쪽 시베리아 고기압이 확장하면서 기온이 영하 18℃ 이하로 급강하했다. 15일 하갈우리(下喝隅里)에서는 기온이 영하 26℃까지 내려갔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자 장병 중에는 추위가 심해 일시적으로 쇼크를 일으킨 병사도 있었다. 해발 1200미터의 황초령을 넘을 때는 호흡 곤란 증세까지 괴롭혔다. 수통의 물이 얼어버려 군복 속에 넣어서 체온으로 보온해야만 마실 수 있었다. 음식물도 수분이 들어있는 것은 모두 얼어붙었다. 얼어버린 물이나 음식을 그대로 먹은 병사들은 복통을 일으키거나 설사를 했다. 칼빈 소총은 얼어붙어 발사가 안 되기 일쑤였고, M1 소총이나 기관총은 총 기름이 얼어서 작동이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마틴 러스의 말처럼 미 해병 1사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맹추위. 고지대와 내륙의 혹심한 추위. 해발 1000미터를 넘는 개마고원의 산악지형이었다.

 중공군의 포위 사실을 모른 채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5일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날 서부전선의 미 8군은 중공군 대공세로 청천강 교두보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했다. 8군과 협공하기로 한 미 해병 1사단의 작전 목표가 상실된 것이다. 맥아더는 해병1사단에 후퇴를 명령했다. 이틀 후인 27일 밤 영하 29℃까지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 중공군 6만 명이 총공격을 감행했다. 맹추위 속에 치열한 근접전투가 벌어졌다. 참혹한 날씨 조건은 미군이나 중공군에게 동일했다. 미군은 동상을 방지하는 비책과 난방물품을 보급함으로써 전력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위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중공군은 혹한으로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추위로 인한 해병 1사단의 병력 손실이 7313명이었던 반면에 중공군은 9병단에서만 5만1000명이나 발생했다.

 미 해병1사단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남하를 계속해 12월 15일에 흥남에 도착해서 대기 중인 함정에 승선한다. 이어 미 육군, 한국군 및 피란민이 철수하니 이것이 바로 함흥ㆍ흥남 철수 작전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퇴한 전투가 무슨 승리였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 전투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의 영웅적인 투혼이 없었다면 동부전선의 전 병력이 궤멸됐을 것이라고 전사가들은 말한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후퇴의 변(辯)을 남긴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유연한 사고와 날씨를 잘 이용한 리더십이 장진호 전투를 미 해병 전사에 자랑스러운 전투로 남게 만든 것이다.   


Tip - 탄약보다 난방시설이 먼저?

 장진호 전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장진호 동쪽에서 싸웠던 미 7사단의 장병들은 놀랍게도 동상으로 인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것은 7사단 지휘관이 평소부터 장병들에게 추운 날씨를 대비한 훈련을 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는 마른 양말을 자주 갈아 신게 했다. 또 손발을 계속 움직여 혈액 순환이 이뤄지도록 하는 습관을 가르쳤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런 작은 관심과 지휘가 무위의 병력 손실을 막는 가장 큰 힘이 됐다.

 1연대장 풀러 대령은 11월 하순 고토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전투를 위해 탄약을 먼저 보내달라고 할 것인가, 난방시설을 먼저 보내달라고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총검만으로도 싸울 수가 있다. 우선 생존(生存)하는 것이 긴요하다.” 풀러 대령은 난방시설을 먼저 보내 주도록 요청했다. 당연하게도 1연대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후퇴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날씨를 전투에 적극 활용한 리더십이 동상 등의 비전투적 손실을 중공군보다 7분의 1 이하로 줄여 영웅적인 철수작전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두 지휘관의 사례는 한랭지 작전의 특징을 잘 이해한 조치였다. 리더들은 전장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해 전투에 활용해야만 한다. 탄약이 소중하다는 고정적인 패러다임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상황에 따른 창의적 패러다임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담보하는 것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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