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인 것이다.”2004년부터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반발을 감수하고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은 동북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증대함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혹자는 고구려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중국인의 심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구려는 중국에 수치스러운 역사를 만든 대단한 나라였다.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하면 중국의 수치는 자연스레 덮어지는 효과까지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수나라는 200년이나 분열됐던 중국을 통일한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다.
그러나 고구려 또한 만만히 볼 수 없는 강국이었다. 고구려의 영양왕이 먼저 공격해 오자 수문제는 고구려 침공을 결정했다. 충신들은 침공시기가 장마기간과 겹친다고 공격을 늦추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대륙을 통일한 수문제에게 날씨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598년 6월 수문제는 30만의 대군을 동원해 지금의 북경을 출발, 임유관과 유성을 거쳐 요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때 동북아 지방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기상현상인 장마가 시작됐다. 장마철 집중호우로 길이 끊어지자 군량미 수송이 이뤄지지 않았다. 장병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됐고, 전염병까지 만연하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다.
한편 산동반도의 동래로부터 평양을 향해 출정한 수군(水軍) 역시 발해만에서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배가 난파되고 말았다. 결국 수나라는 아예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전력의 90% 이상을 손실했다. 수문제는 눈물을 흘리며 퇴각하고 말았다.
수문제가 죽고 양제가 즉위하자, 양제는 선왕의 원수를 갚고자 61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당시 동원됐던 수나라의 병력은 자그마치 11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대병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식량 수송’이었다. 장마로 1차 침공에 실패했던 경험을 갖고 있던 수양제는 이른 봄에 출정을 단행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마치려 했다.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못했던 고구려는 필사의 저항으로 시간을 버는 작전을 구사했다.
고구려의 지연전술을 알게 된 수양제는 장마철이 오기 전에 고구려를 항복시키기 위해 30만 명의 별동부대를 선발해 곧바로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도록 했다. 수나라의 장수 우문술은 평양성 30리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는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넘어간 것이었다. 유인전술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챈 우문술은 급히 퇴각하게 된다.을지문덕 장군은 장마철인 7월 하순의 날씨를 이용해 수공작전을 펼친다.
안주 부근의 살수 상류에서 강 폭이 좁은 지역에 임시로 제방을 급조해 강물을 최대한 모은 후, 철수부대의 중간 대열이 강의 가운데쯤 도달했을 때 제방을 무너뜨린 것이다. 살수대첩은 수나라의 별동대 30만 명 중 겨우 2700명만이 살아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됐을 만큼 세계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쾌승이었다. 해군 또한 고구려군의 유인 매복전술에 휘말려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2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했던 수나라가 건국한 지 겨우 40년 만에 멸망한 가장 큰 원인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조그만 고구려 따위에게 패하다니….” 수양제는 죽을 때까지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장마라는 기상현상을 이용해 대승을 거둔 고구려인들은 기상 도략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 그 모습은 고구려인들의 초상에 다름 아니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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