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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老兵이 걸어온 길-28-미원전투와 참모교체

입력 2008. 06. 2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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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6일 우리 사단은 평택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오랜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 좋아한 것도 잠깐, 병사들은 조치원에서 내려 또 걸어야 했다. 거기서 동북쪽으로 길을 바꿔 내륙 산악지방으로 들어가야 음성이었다.
    지프로 남하하던 나는 전의역 앞 교차로에서 또 김백일 대령을 만났다. 우리가 작전을 숙의하는 동안 적 야크 전투기 기총소사 공격을 받았다. 잽싸게 나무 밑으로 숨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적에게 쫓기면서 명령에 따라 싸우는 초라한 대장정은 한여름 내내 이어졌다. 병력은 4000여 명을 헤아렸으나 군비와 복색은 군인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울을 탈출할 때 입었던 바지저고리 차림인가 하면, 아래 위가 다른 국적 없는 옷차림도 있었고, 번듯한 무기를 지닌 사람도 드물었다. 이름은 사단이었지만 실제로는 연대급도 못됐고, 기본적인 포병부대조차 없었다.
    7월 7일 부대를 이끌고 청주를 지나 괴산군 증평읍에 이르자, 6사단 사령부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그들은 장비와 행색이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 장병들의 사기도 높은 것 같았다. 강원도 영월 상동의 중석 광산에서 징발한 미제 트럭 수십 대를 몰고 다녔다. 새삼 우리의 초라한 행색이 한심했다.
    작전 숙의 중 적 전투기 공격 받아
    8일 오후 우리는 백마령을 넘어 충북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진지교대를 하게 돼 있었다. 나는 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미안했지만,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임중령도 보다시피 우리 부대는 너무 지쳤소. 포도 없고 중화기도 없이 전선을 떠맡으면 위태로울지 모르니 준비가 될 때까지 오늘 하룻밤만 같이 좀 전선을 지켜주면 안 되겠소?”
    동락리 전투에서 올린 전공으로 부대원 전체가 한 계급씩 특진해 사기가 충천해 있던 그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일로 그는 나중에 김종오 6사단장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포병대를 가진 7연대가 우리 뒤에서 정면을 엄호해 줘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국군은 또 밀려 내려갔다. 7월 12일 음성을 내주고 괴산을 지나 14일 미원 일대에서 우리 부대는 다시 적과 전투를 치렀다.
    오랫동안 같이 싸운 연대장 등 떠나

    여기서 나는 오랫동안 같이 싸운 11연대장 최경록 대령,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과 헤어져야 했다. 그들은 수도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한 김석원 장군 휘하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김장군은 복귀조건으로 옛 부하들을 다시 불러 모으도록 직접적인 인사권 행사를 약속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능한 참모들을 떠나보내게 된 것이 너무 서운했지만 자기가 믿는 상관 곁에서 싸우겠다는 데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된 것은 김장군과 친숙한 사이로 5사단 작전참모였던 문형태(육군대장 역임) 중령이 내 곁에 남아 준 일이다.나는 문중령에게 “왜 김장군 밑으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제부터는 미군과 연합작전을 해야 하는 전쟁인데 미군의 작전을 이해하고, 미군과 뜻이 통하는 지휘관과 같이 싸우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곁에 남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는 앞으로의 전쟁 양상을 예견하는 듯했다.나는 11연대장 후임으로 김동빈 중령을 임명하고, 부상으로 후송된 13연대장 김익렬 대령 후임에 최영희 대령을 임명했다. 그리고 12연대장에는 김점곤 중령과 함께 20연대장이던 박기병 대령을 임명했다. 1개 연대에 두 명의 연대장은 전시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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