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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전사여행<9>대전 ‘세천터널

입력 2007. 10. 2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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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에서 4번 국도를 타고 옥천 방면으로 가다보면 대전 끝자락에 하나의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세천동이다. 작고 맑은 개울들이 많이 흘러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개울보다 저수지와 늪지·울창한 수림으로 이뤄진 세천 생태보전림이 있다.

    식장산 자락에 자연생태 환경이 잘 보존돼 있어 사계절 어느 때 찾아도 좋은 이곳은 대전 8경으로 선정돼 있고, 우리 고유의 토박이 식물 800여 종을 포함해 약 60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맑고 아름다운 저수지는 한폭의 수채화처럼 호젓하고 아늑하기만 하다.

    세천동에서 옥천으로 가기 위해 지나는 세천터널은 대전과 충북의 시·도 경계선으로 1905년께 첫 개통돼 수많은 증기기관차와 디젤기관차가 다니던 곳이다. 이후 2003년 KTX 개통을 위한 선로 보수공사로 인근에 구정터널이 개통돼 현재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터널은 50년 7월 20일 충청남도 청사에서 마지막 무전연락 후 실종된 미8군 24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구출특공대(결사대) 33명과 김재현 기관사의 한이 서린 곳이다.

    충북 영동까지 후퇴한 미24사단은 특공대 33명을 조직하고 김기관사가 운전하는 미카호(1940년 8월 제작돼 부산~신의주간 전국간선에서 운행되다 83년 4월 29일 퇴역한 증기기관차)를 이용해 충북 옥천과 세천 터널을 거쳐 대전으로 들어가기로 했다.이미 옥천과 세천까지 적 수중에 들어가 적군에 포위된 대전에서 연락조차 끊긴 딘 소장을 구출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작전임무였다.

    이러한 위험한 작전에 기관차를 몰겠다고 김기관사(당시 27세)가 자원했다.김기관사는 현재현·황남호 두 기관조사와 함께 미 특공결사대원들을 기관차에 연결된 석탄차와 화차에 싣고 세천터널을 막 통과하려고 할 때 박격포탄과 수류탄·따발총 등 적의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적의 공격을 뚫고 대전에 도착한 결사대는 이미 10여 명이 희생됐으나 딘 소장 구출작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불바다가 돼 검은 연기가 치솟는 대전에서 1시간여 동안 목숨을 걸고 딘 소장 수색작전을 벌였으나 지척을 분간하기 조차 힘든 대전에서 딘 소장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미24사단이 있는 영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금 세천동 일대를 지나가던 중 중화기로 무장한 적군은 더욱 치열한 공격을 퍼부었고 32명의 특공대원과 김기관사는 현장에서 적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김기관사의 유해는 황남호 기관조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영동산 아래 묻혔다가 정전협정 후 다시 고향인 충남 논산군 노성면 정암리 뒷산으로 이장됐다. 이후 83년 국방부에서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해 현재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 있다.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62년 대전철도국 직원들은 성금을 모아 적의 흉탄에 산화한 지점인 세천터널 부근 철로변에 순직비를 세웠다. 현재 철도박물관에는 김기관사가 전사하기 3일 전인 7월 17일까지 기록했던 운전일지 등 그의 유품이 부곡관에 전시돼 있다.

    <육군2군사령부 정훈공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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