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군현충시설탐방

<61>가평지구전투전적비

입력 2007. 04. 2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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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음아 퍼져라, 내 꿈 다시 피어나면. 너와 나의 영원한 젊은 미소, 밝은 내일을 약속하리라.”스무 살 무렵 강촌역으로 향하는 경춘선 기차 안에서 필자는 이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곤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저녁 때 MT가 무르익으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러야 하고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라는 타박으로 고생하기 전에 얼른 노래 한 곡을 해치울 요량이었다.

    음도 그렇게 높지 않고, 가사 외우는 것도 만만하며, 소리도 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가평읍내에서 강촌 방면으로 차를 몰고 3분 정도 가다 보면 낮은 고갯길 옆에 ‘가평지구전투전적비’(사진)라는 갈색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 옆으로 만들어진 오솔길을 따라 산봉우리에 오르면 전적비가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오른 김에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저 산 밑을 내려다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 변을 따라 경춘선 철로가 소박하게 놓여 있다. 저 철로를 따라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고백하리라’ 마음먹으며 길을 떠났을까. 그 마음, 그 노랫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새로운 계절을 만들기 위한 산고가 계속되고 있는 4월 21일 가평지구전투전적비가 있는 경기 가평군 가평읍을 찾았다.

    가평이라는 곳이 북한강을 끼고 있는 만큼 이곳은 일반인들에게 관광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 ‘가평’이란 검색어를 쳐 보니 펜션·MT란 단어가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처럼 가평은 우리들에게 관광지·휴양지로 유명하지만 역설적으로 근현대사 속의 가평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조선 말기∼대한제국기라는 대격변기 속에서 가평인들은 구미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번민과 저항의 삶을 살아야 했다. 유학자 김평묵(1819∼1891)은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1881년 침략적 제국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조선 개국과 개화를 반대하는 신사척사운동을 지도했다. 1905년 백발성성하던 79세의 전 우의정 조병세(1827∼1905)는 을사늑약에 항의하며 자결한 실천적 관료로 유명하다.

    김평묵과 조병세가 근대사의 거센 물결을 막고자 했다면, 한국전쟁사에서 가평은 중공군의 대공세라는 거대한 물결을 감당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1951년 4월 중공군이 제1차 춘계공세로 사창리 지역을 돌파하고 이 지역까지 넘어왔다. 그리고 4월 25일 새벽 3시 가평~청평간 주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야간을 이용해 대공격을 감행했다.

    아군 2개 연대는 중공군 대공세에 격렬하게 대응, 중공군은 오전 7시 30분부터 퇴각했다. 이에 아군은 추격전을 실시해 가평 서북쪽 7㎞까지 진격함으로써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가평지구전투전적비는 58년 육군1군단이 이 성공적인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경기 가평군 가평읍 산 94-1번지에 세운 것이다. 가평의 역사를 보니 인간의 역사는 한 번 격동과 파란의 세월이 이어지면 그 다음에는 고요와 평안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정해진 이치인가 보다.

    <서동일 연구관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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