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군사문화재

한국의 문사문화재 순례<142>권응수 장군 유물

김병륜

입력 2006. 11. 2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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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 7월 27일 경상좌도에 위치한 영천성 주변으로 수많은 의병이 모여들었다. 영천과 경주 지역 의병들을 중심으로 멀리 의성·흥해·영해·대구부터 가까이는 신령·하양·자인의 의병까지 총병력은 3970명에 육박했다.
    이들의 목표는 왜군이 점령한 영천성 탈환이었다. 당시 전체적 전황은 조선군에 불리했지만 경상좌도 의병진의 사기는 높았다. 공성전의 어려움을 알았기에 의병들의 준비는 철저했다. 의병들은 성곽을 넘기 위한 대형 사다리, 조총을 막기 위한 방패, 백병전에 대비한 몽둥이를 준비했다. 또 성벽보다 높은 곳에서 활을 쏠 수 있게 속에 흙을 채운 목책을 만들기도 했다.
    영천성에 주둔하고 있던 1000여 명의 왜군의 저항은 극렬했다. 병력은 적었으나 조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는 정규군이라 전투 수행 능력은 의병들보다 월등했다. 왜군은 성 밖으로 나와 공세적으로 압박을 가했으나 의병들은 굴하지 않았다. 격렬한 백병전 끝에 왜군은 성안으로 후퇴했다.
    의병들은 각종 공성 기구로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쇄도했다. 왜군들이 성 안 건물에 의지해 저항을 계속하자 의병들은 화공전으로 응수했다. 화염이 치솟자 당황한 왜군들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의병들은 달아나는 왜군들을 집중 공격했다. 당시 의병들이 왜군들을 처형하는 모습이 “마치 오리가 줄을 지어 고기를 잡는 것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일방적인 승리였다. 잘라낸 왜군의 목이 517두, 노획한 조총 등 총통류가 900여 자루, 노획한 말이 200필에 달하는 대승이었다.
    오늘날 영천성 수복전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전투였다. 실록에는 “영좌를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영천성 수복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집중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성곽을 공격해 점령한 최초의 전투였다. 경상우도 의병장 김면이나 경상좌도·우도의 경계지점에서 활약한 곽재우 장군도 영천성 수복 이전에 몇 차례 작은 승리를 거뒀으나 전투 강도면에서 영천성 수복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연구가인 최효식 교수는 영천성 수복전에 대해 “임진왜란 지상전 최초의 승리”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영천성 수복전을 지휘한 두 명의 의병장이 권응수(1546~1608) 장군과 정대임 장군이다. 유생 출신인 정대임과 달리 권응수는 별시 무과에 합격한 정식 무관 출신의 의병장이었다.
    권응수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경상좌도 수군에 소속돼 있었으나 초전에 좌도 수군이 몰락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대동전투나 한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두각을 나타내던 권응수는 영천성 수복에 성공하면서 관군 장수로 다시 복귀, 경상좌도 병사·경상도 방어사 등을 역임하게 된다. 임란 종전 후 권응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진다. 1등 이순신·권율·원균 2등 신점에 이은 서열 다섯 번째였다.
    권응수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장수 중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풍부한 유물을 남기고 있다.
    장군이 쓰던 장검(사진)을 비롯해 국왕 선조의 교지와 유서 등이 남아 있으며 공신 책봉과 관련된 선무공신교서, 태평회맹도병풍, 장군 영정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1980년 8월 보물668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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