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9월 어느 날 나는 전 부대의 PX 실태 조사에 착수하면서 실무 처장(대령)과 보좌관을 대동하고 불시에 모 야전 부대 PX를 급습했다. PX는 지저분한 창고 한쪽에 박혀 있듯이 있고 물품은 어두컴컴한 폐창고에 보관돼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전깃불도 없이 질척거리는 한쪽에 막걸리 드럼통이 묻혀 있고 관리병은 거지꼴로 코 밑이 시커먼 채로 멀뚱거리고 있었다.
나는 연대장과 대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만 내놓고 땅속에 묻혀 있는 막걸리 드럼통을 들어내도록 지시했다.
파헤쳐 올려진 드럼통을 바닥에 붓자 시커먼 먹물이 쏟아져 나왔다. 헌 농구화짝이 나오고 하얗게 가죽이 벗겨진 채 죽은 쥐, 퉁퉁 불어 터진 가죽장갑이 나왔고 침전물은 반 뼘쯤 됐다. 한마디로 독극물 드럼통이었다.
여기에 막걸리를 부어 찌그러진 주전자로 한 번 휘저어 떠다가 병사들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가죽이 벗겨진 채 죽은 쥐는 돌아다니다가 드럼통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나는 곧 막걸리 판매업자 점검에 나섰다. 그들은 미군이 사용하던 휘발유 탱크(250갤런)에 막걸리를 담아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달리는 차를 세워 막대기로 탱크 속을 휘저어 부었더니 불그스레한 녹물과 침전물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이 얼마나 배탈이 많이 났을까를 생각하니 분노가 솟구쳤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나는 업자들을 불러 즉시 우유 배달용 알루미늄 탱크로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바꾸기 전까지는 막걸리 납품을 금지시켰다.
PX의 드럼통도 옹기 항아리로 교체해 45도 각도로 눕혀 묻도록 했다. 그래야 청소하기 좋고 검사도 쉽게 할 수 있었다. 묻은 탱크 주변에는 하얀 타일을 깔고 매일 관리병이 청소하도록 했다.
다음에는 빵 제조 업체를 기습 방문했다. 한결같이 위생 시설이 엉망이었다. 재래식 화장실 옆,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시궁창 옆에서 돌빵과 풀빵을 굽고 있었다. 나는 삼립빵·콘티빵의 제조 과정을 답사하고 이와 똑같은 사양서대로 제조해 납품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각 업체에 통고했다.
그런 지시를 내린 한 달 후 청와대에서 탄원서라며 서류 뭉치를 보내 왔다. 전국 막걸리제조협회·제빵업협회가 연판장을 올린 것이었다.
연판장은 ‘수십 년 동안 국군을 먹여 살리고 또 수십 년 동안 지역 부대장을 돕고 한 덩어리가 돼 박리에도 불구하고 봉사했는데 최모 원호관리단장이 부임하더니 업자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시설을 증설하라는데 대기업 흉내를 내다가는 다 망하게 됐으며, 특정 업체를 봐주는 계략이니 단장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연판장을 육군본부 게시판에 붙이도록 했다. 그동안 찍어 둔 사진도 확대 전시해 놓고 전국 납품업자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시위하듯 가족까지 동원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나는 눈도 깜짝 안 하고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 후생 사업 명목으로 유지되던 부대 PX를 오늘자로 중앙 관리 제도로 바꿔 통합 운영하고 그 책임을 본인이 진다. 이제부터 혈기 왕성한 국군 장병들에게 저질 불량 주류나 비위생 제과·제빵을 공급하는 업자는 군기 차원에서 엄히 다스린다. 이 자리에 온 업자들은 개선 요구 서약과 서명을 받는다. 서명하지 않을 경우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들은 청와대 진정서가 직접 원호관리단장 앞으로 내려온 것을 보고 벌써 떨고 있었다. 특히 단장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고 지은 죄가 있으니 결국 서명했다.
국군 창설 이래 계속 저질러진 PX 비리는 한 번에 척결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본과 정보력을 동원, 나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데 온갖 심혈을 쏟았다. 심지어 일선 부대장들까지 가세해 나를 공격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꿋꿋이 밀고 나갔다. 이 공로로 나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8사단장 보직을 받았다. 원호관리단장이 진급한 것은 내가 첫 경우였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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