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군사문화재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32>면갑

김병륜

입력 2004. 03. 2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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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갑(綿甲·사진)은 무명을 여러 겹 겹쳐 만든 조선 말기의 갑옷이다.
    조선 고종(高宗) 재위 시절이던 1867년, 실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김기두(金箕斗)와 안윤(安潤)으로 하여금 총탄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을 만들게 했다.
    병인양요(1866년)를 겪은 직후 서양세력에 의한 유사한 침략 시도가 계속될 것을 우려한 흥선대원군이 그 대비책의 일환으로 방탄 성능이 좋은 새로운 갑옷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새로운 갑옷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실시한 결과 무명 천을 12겹으로 겹치면 조총 탄환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시험 결과에 따라 조선 조정은 무명 천을 13겹으로 겹친 면갑을 제작, 병사들에게 보급했다.
    면갑은 두정갑이나 두석린갑에 비해 제작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이 또 다른 장점이다. 이 때문에 장수급이 주로 착용한 두정갑이나 두석린갑과 달리 면갑은 일선 병사들이 주로 착용했다.
    이 같은 면갑은 1871년 6월에 벌어진 신미양요에서 조선군에 의해 실제로 사용됐다.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광성보(廣城堡)를 공격한 미군들의 전투경험을 담은 한 보고서를 보면 “조선군들은 대부분 무명을 여러 겹으로 겹쳐 놓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이 갑옷은 총알을 막는 데는 전혀 효과가 없었으며, 오히려 6월의 더운 날씨에 병사들을 탈진 상태로 몰아넣는 결과만 가져왔다”는 미군들의 증언도 덧붙이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강성문 교수는 “면갑은 조선의 조총 탄환을 막을 정도의 방탄 성능은 가지고 있으나 당시 서양의 발달된 신형 소총을 막을 성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교수는 “면갑 등 신무기 개발을 위해 노력한 흥선대원군의 의지는 높게 평가할 만하다”고 전제한 뒤 “서양 무기의 성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탓에 면갑이 실전에서는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흥선대원군 시대에 만들어진 면갑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육군박물관에 실물이 1점 남아 있으며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과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도 실물이 1점씩 소장돼 있다.
    육군박물관에 남아 있는 면갑은 무명이 13겹이 아니라 30겹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전 육군박물관장 이강칠 박사는 육군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30겹 면갑에 대해 “유난히 무거워 실전용이라기보다 흥선대원군 시절 조총 관통시험 당시 실험용으로 특수 제작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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