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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 열전<67>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미국) -상-

입력 2003. 12. 1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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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사진)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연방 정부군 총사령관으로 남부동맹군을 격파하는 데 주역을 담당한 장군이다.

    그랜트가 남북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의 전략·전술이 남부동맹군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그랜트의 남북전쟁 승리가 미국을 분열에서 통일로 이끌었고 이 통일이 미국으로 하여금 오늘의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랜트는 때로는 술주정꾼 혹은 전쟁터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지만 모든 군사력·경제력을 총력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전략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남북전쟁 승리로 미합중국은 분열되지 않고 통일국가로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 승리는 그에게 두 번 임기 대통령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 시대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그랜트의 유년과 소년 시절 민간인 및 군인생활의 시작은 둘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1822년 4월27일 오하이오 주 포인트 플레전트에서 피혁제품을 다루는 가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랜트는 1839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후 히람 율리시스에서 율리시스 히람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유는 석 자 이름을 약자로 표시할 때 ‘포용한다’는 뜻의 ‘hug’가 되기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자기를 웨스트포인트 생도로 추천한 오하이오 주 연방하원의원이 그의 이름을 율리시스 심프슨으로 잘못 표기해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이를 고치려면 혼란과 번거로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름의 오기(誤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마침내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로 낙착된 것이다.

    그랜트는 1843년 웨스트포인트 동급생 39명 중 21번째 성적으로 졸업함으로써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을 2회 연임한 정치가로 변신했지만 그의 초기 군인생활은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승마술 장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첫 장교 임관 후 보병에 배치됐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후 첫 배치부대는 미주리 주 제퍼슨 배락스 연대였다.

    1846년 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와 제퍼슨 배락스 연대는 리오그란데 국경을 따라 재커리 테일러 장군 부대와 합류했다. 테일러 장군 역시 직업군인에서 후에 대통령(1850~53년)이 된 인물이다.

    그는 40년간의 군생활 끝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보다 4대 앞선 선임 대통령으로 재임 중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도 대통령 재임 중 노예해방과 남부 11개 주 분리 문제를 둘러싸고 고민했으나 결국 연방국가의 분열을 막는 데는 군사력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남부 루이지애나 주 출신으로 미시시피에 목화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노예제도와 남부 주 분리주의에 반대, 미 합중국 연방노선을 고수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랜트는 초기 멕시코 전쟁에 참전해 몬테레이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운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의 부대는 1847년 윈필드 스콧 장군이 지휘하는 멕시코 베라크루스 침공에 참가하기 위해 남부로 이동했다. 스콧 장군은 그랜트의 대선배로 인디언 소탕전쟁에서부터 멕시코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싸웠고 미국·멕시코 전쟁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랜트는 미국-멕시코 전쟁 때인 1847년 4월부터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가 함락될 무렵 그랜트는 대위로 명예진급, 정규군 중위 진급의 길을 열었다.

    그랜트는 1848년 미주리로 돌아와 줄리아 덴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지방 농장집 딸로 그랜트가 제퍼슨 배락스 부대에 배치될 때부터 사귀어 온 애인이었다. 그랜트는 그후 인사이동에 따라 미시시피·뉴욕· 미시간 주를 비롯, 태평양 연안을 전전하다보니 그녀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랜트는 1854년 정규군에서 대위로 진급, 캘리포니아 주 훔볼트 요새로 전근됐다. 그는 이때 새로운 임지로 부인을 데려갈 수 없자 또다시 과음하게 됐고 이것이 문제가 돼 그는 군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됐다.

    〈남북전략연구소장 여영무 www.libertyclu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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