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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고운글<58>속은 썩이고 재능은 썩히고

입력 2003. 09. 0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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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개 숙인 벼조차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삭 끝 부분 몇 개만 익었고 나머지는 쭉정이뿐이다. 아직도 까치머리처럼 고개를 쳐들고 있는 푸른색을 띤 벼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마을 한석주(44) 씨는 지난 26일 논 900평을 트랙터로 갈아엎었다.(세계일보 8. 28. 25면)

    “30년 동안 사과 농장을 했지만 올해가 최악이에요.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니 사과가 익을 수 있겠어요? 벌레는 또 어찌나 많이 생기는지…….”(동아일보 8. 29. 37면)

    “지난 3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전복인데 적조 때문에 하루아침에 모두 잃었습니다.”

    27일 오전에 찾은 한 양식장은 썩는 냄새로 코를 틀어막지 않고는 양식장에 들어설 수조차 없었다. 적조로 양식판에서 죽은 전복을 떼어 내던 문왕식(47) 씨는 “하도 많이 죽어 수를 셀 수 없을 지경”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세계일보 8. 28. 25면)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농민, 어민의 표정이 어둡다. 올해 잦은 비와 일조량 부족으로 벼농사, 과일 농사를 망쳤고, 적조 확산으로 양식업도 망쳤다. 이를 바라만 봐야 하는 농어민들은 속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속을 썩이고 있는 것이다. ‘썩이다’는 “걱정이나 근심 따위로 마음이 몹시 괴로운 상태가 되게 하다”로, “그는 말년에 자식 문제로 속을 썩일 대로 썩이다가 화병을 얻었다”처럼 쓰인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직장을 얻지 못하고 집 안에 틀어 박혀 세월을 보낸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이다. ‘썩히다’는 “물건이나 사람 또는 사람의 재능 따위가 쓰여야 할 곳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내버려진 상태에 있게 하다”로, “집안에서 썩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일거리가 없어서 값비싼 기계를 그냥 썩히고 있다”처럼 쓰인다.

    재능을 썩히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는 속을 썩이게 된다.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않고 적소(適所)에서 활용하여 속 썩일 일이 없었으면 한다.

    〈국립국어연구원 어문실태연구부장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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