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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세 뒤바꾼 전투, 한눈에 생생 묘사

<31> 18세기 조선화가의 ‘평양성탈환도’
2015. 02. 24   14:37 입력

평양성 탈환전 흐름 압축적 표현명나라 군사 공격모습 그려

존명대의 반영실제와 달리 초라하게 그려진 조선군 아쉬움

 

 

대하사극 ‘징비록’이 방송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또다시 일고 있다. 지난해 상영된 영화 ‘명량’이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순신 열풍을 일으켰듯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이 드라마가 7년 전란의 총체적 흐름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임진왜란 관련 영화나 사극이 특정 전투나 사건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큰 틀에서 전란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8000명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시작된다. 부산진과 동래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한 왜군은 거의 저항도 받지 않고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5월 3일)했으며, 두 달도 안 돼 북방 거점인 평양성에마저 무혈입성한다. 육지에서는 파죽지세로 북상했지만 바다에서의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5월 7일 이순신 제독이 옥포에서 첫 승을 거둔 이후 바다는 조선 수군이 장악했다. 7월 명나라 요동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7월 17일 명나라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왜군의 공성계(空城計)에 빠져 실패하고 그 후 화의협상으로 50일간의 휴전이 체결됐기 때문이다. 10월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고 조선군의 전력이 회복되면서 곳곳에서 승전보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함경도의 북관대첩과 진주성 전투 승리가 대표적이다. 왜군들은 보급 곤란과 의병들의 게릴라전, 그리고 조선의 겨울 추위에 직면하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 1593년 설 쇠고 바로 공격

 이러한 교착 상태를 바꿔놓은 사건이 1593년 2월(음력 1월)에 있었던 평양성 전투라 할 수 있다. 7월 평양성 공격에 실패한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만3000의 대군을 파병하게 된다. 여기에는 남방의 화포부대와 화기수(火器手)도 포함돼 있었다. 12월 하순 압록강을 넘은 명나라군은 곧장 평양성 공격에 나서게 된다. 여기에 조선군 1만여 명도 합세해 5만3000의 대군이 출정한 것이다. 설 같지 않은 설을 보낸 조명연합군은 음력 1월 6일 평양성을 포위하고 사흘간 탈환전을 벌이게 된다. 그림은 이러한 전투 장면을 담고 있는 ‘평양성탈환도’ 병풍이다.

 첫날 평양성 북쪽 모란봉에 주둔한 왜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명나라군의 반격에 대패해 물러가게 된다. 왜군의 심야 기습도 불화살 대응으로 실패한다. 둘째 날 오전 명나라 군대가 일시에 서쪽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했지만 성문을 돌파하지 못한다. 셋째 날인 1월 8일 조명연합군은 전 병력을 동원, 전방위로 공격하게 된다. 북문(칠성문)·서문(보통문)·남문(함구문)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왜군의 전력을 분산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조선군은 명나라 중군과 함께 남문 공격을 담당했다. 당시 왜군은 1만~1만5000명 수준으로 절대적 수적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 이여송의 독려와 명군의 분전

 그림 오른쪽 상단에 갈색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이가 이여송이다. 그는 일단의 친위대와 함께 여러 진영을 오가며 전투를 독려했다. 전장에 근접해 지휘했기 때문에 왜군의 총탄에 말이 쓰러질 정도였다. 그가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 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소리치자 절강성 출신 장수 낙상지(尙志)와 그 부하들이 성에 오르기 시작했다. 북쪽 고지인 모란봉은 오유충(吳惟忠) 부대에 의해 점령됐고 오후에 서문과 남문마저 열리자 명나라 군사들이 내성(內城) 안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왜군은 외성(外城) 방어벽이 붕괴될 경우를 대비해 성 안에 엄청난 규모의 토굴을 만들어 뒀다. 명나라군이 성내로 진입하면토굴에 웅거하며 결사항전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토굴에 숨어 조총을 쏘아대며 격렬히 저항하는 왜군을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군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여송은 명군의 인명 손실을 막기 위해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기로 결정한다. 1월 8일 밤 왜군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함으로써 평양성 탈환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패주한 고니시군이 한양에 도착했을 때 왜군은 600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평양성 승리를 계기로 임진왜란의 전세는 조명연합군 우위로 바뀌게 된다. 백제관 전투(1월 27일) 패배로 명나라군의 진격은 주춤했으나 2월 12일 행주산성 전투 승리로 대세를 가름하게 된다. 전의를 상실한 왜군은 결국 4월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한다.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왜군은 순천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에 왜성을 쌓고 움직이지 않았다. 평양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꾼 결정적 전투로 간주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은 평양성 탈환전의 흐름을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담고 있다. 그림 가운데 대각선으로 평양성의 성벽과 성문들이 이어져 있어 명나라 군사들의 공격 모습이 전면에 효과적으로 묘사돼 있다. 전반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시간적 흐름을 보여준다. 가장 왼쪽 누각은 을밀대이며 그 다음 화포 공격을 받고 있는 성문이 북쪽 칠성문(七星門)이다. 그 아래 2층 누각의 보통문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장군기를 휘날리며 공격을 담당했던 좌협대장 양원(楊元)의 모습도 보인다.

 보통문에서는 성문에 포진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왜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곧 패퇴해 후퇴하게 되는데 그림 오른쪽에는 내성으로 후퇴하고 있는 왜군의 황급한 움직임이 그려져 있다. 보통문 왼쪽 능선이 내성의 내부 성곽을 이루며 왜군은 이 안에서 최후의 항전을 전개하게 된다.

 가운데 멀리 보이는 2층 누각이 대동문(大同門)이다. 평양성은 대동강 서안을 따라 축조됐기 때문에 이 문은 대동강과 맞닿아 있다. 패전한 왜군이 여기로 후퇴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넜을 것이다. 동쪽 성곽을 그려 넣음으로써 평양성의 공간감을 살렸을 뿐 아니라 사건의 전개 과정까지 짐작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초라하게 그려진 조선군

 이 병풍이 제작된 시기는 18세기 말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성문이 1714년 재건된 평양성의 모습이며 명나라 군사들의 전투 장면이나 복식이 18세기에 유행했던 군담소설의 삽화에 등장하는 장수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기보다 전설적 전투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군대의 모습이 매우 초라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그림 왼쪽 중간에 마치 구경꾼처럼 서있는 5명의 조선군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에 8000여 명의 조선군이 남문 공격에 가담했고 2000명의 승병은 모란봉 공격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투 장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의 도움과 이여송의 공적을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나라를 다시 살린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현한 듯하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존명대의론(尊明大義論)’은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는 극단으로 치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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