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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프랑스의 영광과 패배 그리고 부활

끝인줄 알았었는데 새로운 시작이었고 시작은 끝을 쏘았다
2012. 04. 10   00:00 입력 | 2013. 01. 05   07:52 수정
 
파리에 입성한 드골 장군이 시민들로부터 환영받는 모습. (출처: 나폴레옹 군사박물관)
프랑스 제1보병연대 장병의 외국군 장교 환영 행사.

 ▶프랑스 전쟁역사가 담긴 나폴레옹 군사박물관

 파리의 중심부 에펠탑에서 멀지 않은 나폴레옹 군사박물관(앵발리드: Invalides). 프랑스 전쟁 관련 각종 전시물과 나폴레옹 1세 묘소가 있다. 이 박물관은 1670년 루이 14세에 의해 퇴역 상이군인들의 병간호를 위해 지어졌다. 건물 대부분은 현재 군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지금도 퇴역군인들을 위한 보훈병원으로 일부 시설이 운용되고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무기 발달과정이 시대순으로 전시돼 있다. 또한 나폴레옹의 유럽·아프리카 정복 과정, 19세기 대외 식민지전쟁, 1·2차 세계대전, 현대전쟁 등에 관한 기록사진과 무기류들이 내부를 꽉 채우고 있다. 특히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이유는 한때 유럽의 황제로 불렸던 나폴레옹이 안장돼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문헌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인물이 나폴레옹이다. 유럽에서 군주제를 종식하는 데 결정적 이바지를 하고 일반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혁신적으로 확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영국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된다. 그는 1821년 5월 5일 52세의 나이로 외롭게 그곳에서 숨을 거두지만 영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1840년 5월에서야 겨우 이곳 앵발리드 돔 성당에 안치될 수 있었다. 나폴레옹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다양한 역사적 시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나폴레옹이야말로 자기들의 조국을 세계 강국으로 부상시킨 위대한 조상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전쟁에서는 비록 패배했지만 처절한 대독 항쟁은 계속됐다

 1940년 5월 19일 아침 5시 39분, 마지노선 라 페르테(La ferte) 지역의 프랑스 제71보병사단 505 장갑벙커 지하 속에서 프랑스군 100여 명이 결사적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독일군 강습공병은 요새의 강철 문을 폭파시키고 벙커 내부에 강력한 폭탄과 연막탄을 집어넣었다. 곧이어 일어난 폭발과 화재에 의한 불길은 지하 35m에 있는 탄약고에 옮겨붙어 대폭발을 일으켰다. 벙커 내부는 화염으로 휩싸였고 병사들은 방독면 속으로 들어오는 연기의 고통을 참으며 지휘관의 조치를 기다렸다. 라 페르테 지역대장 부르귀농(Bourguignon) 중위는 갱도 탈출을 다급하게 상급부대에 요청했다. 그러나 상급 지휘관은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렸고 유독가스에 중독돼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독일군과의 혈투를 계속했다. 전투가 끝난 후 505 장갑벙커 내에서 107명의 프랑스군 장병 시신을 독일군은 확인할 수 있었다. 부르귀농 중위 부대원 중에서 진지고수 명령을 어기고 갱도 밖으로 탈출한 장병은 단 1명도 없었다.

 이처럼 전선지역에서 보여준 프랑스 장병들의 강인한 상무정신은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이후 전 국민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수많은 레지스탕스가 국내외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연합군과 함께 대독 항쟁에 참여했다. 레지스탕스의 지하방송과 신문은 전쟁 승리 이후 독일군 앞잡이들이 반드시 응징되리라고 수시로 적 치하의 프랑스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나치체제 아래서 오히려 독일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레지스탕스 색출에 앞장선 일부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철저한 부역자 처벌로 국가 정체성 재확립

 마침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성공과 8월 파리 해방을 통해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 돌풍이 불었다. 민족반역자 대숙청은 망명정부의 수반 드골 장군 주도 아래 종전 후에도 수년간 매우 가혹하게 집행됐다. 비시 정권의 페텡 원수를 포함한 당시의 각료, 정치인, 언론인, 기업가, 민병대원 등 나치협력 사건의 부역자에 대한 법원기소는 모두 12만4751건에 달했다. 이 중에 4만626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6763명(3910명은 궐석재판)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보고서는 인민재판에서 즉결심판을 받아 처형된 사망자 수가 11만2000여 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나치 치하에서 독일의 전쟁 물자를 적극적으로 생산해 납품한 프랑스의 대기업까지도 반역행위의 범주에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르노 자동차 회사는 전시 생산량을 25% 늘려 독일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회사 전 재산을 프랑스 정부가 몰수했다. 회장 르노는 체포돼 교도소 수감 중 결국 스스로 자살하게 된다. 드골의 이 같은 가혹한 부역자 숙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적 치하에서 국가에 해악을 끼친 프랑스 국민은 반드시 응징당한다는 전통이 분명하게 수립했다.

 ▶프랑스 주방위력은 핵무기, 군은 PKO 및 테러방지 임무에 주안

 파리의 도심지에서 여행객들이 관심을 두면 쉽게 프랑스 주요 군사기관들을 볼 수 있다. 합동참모본부, 각군 본부, 지휘참모대학 등 군 핵심시설과 일부 군사교육기관들이 시내 중심부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또 전 국토 절반 가까이의 치안 유지를 프랑스 헌병 군이 담당하고 있다. 도심지에 있는 군사시설을 일부 시민이 무조건 외곽 이전 하라고 요구하는 한국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지휘참모대 앞에서 만난 프랑스 여군 소령 페이레(Peyre)는 남편도 직업군인이다. 과거 프랑스 국방개혁에 대해 질문하자 “가장 어려운 점은 엄청나게 요구되는 개혁예산을 정부가 뒷받침해 주지 못한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또한 냉전 해체 이후 프랑스의 주적은 사라졌고 외부 위협에 대한 주 억제전력은 핵무기이며 현재 군은 PKO와 테러방지 임무에 주안을 둔다고 했다. 180여만 명의 남·북한 병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와 안보환경이 판이한 프랑스의 국방개혁 모델을 한국군에 적용하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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