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역사속 그때 그는 왜?

우주 원리 공식으로 정리… 서구 ‘계몽사조’ 불 지펴

입력 2018. 10. 2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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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1665년 뉴턴은 왜 떨어지는 사과를 쳐다보기만 했을까?(下)


아이작 뉴턴과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 사진=필자 제공
아이작 뉴턴과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 사진=필자 제공



흑사병 창궐 18개월간 고향집 머물다
떨어지는 사과 보고 수학적 접근 고민
『프린키피아』 발간 중력·운동법칙 설명
계층적 우주관, 기계론적 우주관으로
유럽 이성 중시 불합리 요소 해결 움직임

급기야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불러와


영국 울즈소프에 있는 뉴턴의 생가. 사진=필자 제공
영국 울즈소프에 있는 뉴턴의 생가. 사진=필자 제공



아이작 뉴턴은 1642년 영국 링컨셔 울즈소프의 자영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다소 미숙아로 태어난 탓에 모친은 그가 제대로 클 수 있을지 걱정했다. 뉴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부친이 죽었으나 다행히 그가 두 살일 때 모친이 이웃 교구의 부유한 목사와 재혼한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는 학업보다는 기계공작에 취미와 재능을 보였으나, 주로 혼자서 알아서 노는 아이였다.


동기와 그 결과

다행히 뉴턴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철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학교장 존 스토크스의 조언과 격려가 숨겨져 있던 그의 재능이 발현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줬다. 학업에서 빠른 진전을 보인 뉴턴은 삼촌의 주선으로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교수 연구실 청소 등 잡일을 하면서 학비를 충당하다가 1664년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뉴턴은 아직 학문적 탁월성을 발휘하지는 못했으나, 수학·광학·천문학 등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1665년 잉글랜드 지방에 흑사병이 창궐해 대학이 일시 폐쇄됨에 따라 뉴턴도 잠시나마 귀향해야만 했다.

고향 집에서 머문 18개월 동안 뉴턴은 스스로 ‘기적의 해’라고 말할 정도로 광학·수학·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뉴턴이 먼저 새로운 발견을 한 것은 광학 분야에서였다. 빛 자체를 흰색으로 파악한 데카르트의 이론과 달리 프리즘을 활용해 실험을 거듭한 끝에 뉴턴은 빛이 다른 색깔의 광선들로 이뤄져 있음을 알아냈다. 이어서 깊은 사색을 통해 수학 분야에서, 비록 조만간 독일 수학자 라이프니츠와 일생에 걸친 원조 논쟁에 휩싸이기는 하지만, 미적분을 정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은 중력과 관련된 역학 분야였다. 바로 이 시기에 명상 중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사과는 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항상 지구 중심을 향해 아래로 떨어지는가? 이러한 낙하 현상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고향 집에서 얻은 착상들은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복귀한 이후 하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천재성을 간파한 스승의 후원으로 1669년 27세에 대학의 루카스 석좌교수로 임용되면서 뉴턴은 연구활동에 날개를 달게 됐다.

그가 맨 먼저 심혈을 기울인 연구 분야는 광학이었다. 이는 곧 훅을 비롯한 선구 연구자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뉴턴 이전에 훅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빛이 파동으로 전파된다는 이론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빛이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훅을 비롯한 기성 과학자들이 더 많은 증거 제출을 요구하며 이의를 제기하자 이에 분노한 뉴턴은 특히 훅을 겨냥해 거친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빛의 속성을 집대성한 『광학』을 1703년 훅이 사망한 이후에 출판할 정도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뉴턴은 미적분법 발견의 우선권을 놓고서 독일의 라이프니츠와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과민한 성격 탓에 이 과정에서 뉴턴 자신도 육체적·정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 덕분에 뉴턴은 지적인 자극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뉴턴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는 『프린키피아』 발간에도 훅과의 악연이 얽혀 있다. 뉴턴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684년 왕립학회 동료이자 그 자신 ‘핼리 혜성’의 발견으로 이미 유명인사였던 에드먼드 핼리의 케임브리지 방문과 뉴턴을 향한 그의 연구 독려였다. 이미 중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훅이 핼리에게 자신의 연구성과에 대해 비밀을 유지해 달라는 말을 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러한 비학자적 태도에 화가 난 핼리가 케임브리지로 뉴턴을 찾아와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사과 낙하 목격 이래 책상 안에 처박아 놓은 이 주제에 대한 뉴턴의 관심을 일깨웠던 것이다. 이후 뉴턴은 약 2년 동안 중력 문제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그 결과 1687년 마침내 세 권짜리 『프린키피아』를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의 명저인 『철학 원리』와 대비되게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동안 갈릴레이는 물체가 지구의 중심 쪽으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케플러는 유성의 타원형 궤도 순환을 밝혔으나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난제를 바로 뉴턴이 해결한 것이었다. 책의 핵심 명제는 ‘중력은 만물에 작용하는 힘이며,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뉴턴이 제시한 단순한 공식으로 우리 인류는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과 지구를 통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었다.

뉴턴의 연구 결과에 크게 만족한 핼리는 초판 500부의 출판 비용까지 부담했다. 뉴턴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훅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린키피아』는 과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당시 44세이던 뉴턴의 명성은 브리튼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까지 전파됐다. 그는 1703년 평생 대립한 훅의 사망 직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정부의 조폐국 국장이라는 요직에다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이후 뉴턴은 1727년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의 신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여섯 명의 귀족이 그의 관을 영국 ‘영웅들의 묘지’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운반했다. 과학자 신분이던 뉴턴은 이제 영국의 왕후장상과 나란히 잠드는 영예까지 얻게 됐다.


역사적 영향

천체 운동을 지동설로 설명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은 케플러의 관측으로 실증적 토대를 마련한 후 뉴턴에 의해 설명 가능한 합리적 우주관으로 정리됐다. 뉴턴 자신의 표현대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이를 우리 인류에게 선사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이제 우리는 무한히 넓고 복잡한 우주의 제반 현상을 간단한 수학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우주는 신의 오묘한 섭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기계 법칙에 따라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물질체계로 인식됐다.

뉴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된다. 만일 뉴턴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과학의 역사는 물론 인류 역사도 매우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한 예로, 오늘날 우리가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카시니 탐사선을 보낼 수 있는 것도 300년 전에 뉴턴이 행성의 궤도와 그 운행 원리를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뛰어난 실험과학자인 동시에 탁월한 이론과학자이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또 다른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수정되기는 했으나, 뉴턴의 등장으로 중세의 계층적 우주관은 확고하게 기계론적 우주관으로 대체됐다.

이러한 우주관의 변화는 단지 천문학과 물리학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다른 학문 분야에도 적용돼 이후 서구인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다. 17세기에 우주를 관찰하던 인간 지성의 눈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정치와 사회 분야로 향했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사조 아래 각 분야에서 불합리한 요소들을 찾고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급기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폭발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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