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역사속 그때 그는 왜?

읊조렸던 지동설, 신적 권위 탈피 ‘근대로의 문’ 열다

입력 2018. 10. 1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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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독백해야만 했을까? (下)


고성능 망원경 ‘지동설 발견’ 계기

목성 중심으로 도는 4개 천체 발견

 

1630년대 태양중심설 설파 책 내놔

분노한 로마교황청 결국 발간 금지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접근

천문학 변화 넘어 일상 진보를 추동

 

베네치아 도제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는 갈릴레이.

 

이 글의 주인공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사에서 음악가이자 수학자였던 빈센초 갈릴레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피렌체로 이사한 그는 그곳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수학과 역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나 의사가 되길 바란 부친의 뜻에 따라 18세가 되던 1581년 피사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무리한 결정이었다. 입학 후 그는 전공인 의학보다는 수학 연구에 깊숙이 빠졌기 때문이다.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그는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가 쓴 책들을 보고 매료됐다. 결국 부친을 설득해 대학을 중퇴한 그는 본격적으로 수학 연구에 몰입해 점차 명성을 얻었다.

드디어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과에 적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린 갈릴레이는 1592년 부친이 사망하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베네치아 공화국 산하의 파도바 대학 수학과 교수로 이직했다. 이곳에서 18년 동안 재직하면서 그는 기하학, 천문학, 역학 그리고 심지어 축성학까지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곧 관련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내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597년 케플러의 『우주의 비밀』을 읽은 후 그가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에 공감한 갈릴레이는 그에게 서신을 보냈고, 이후 두 사람 간 접촉은 계속됐다. 하지만 아직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태양중심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달라는 케플러의 요청에 갈릴레이가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망설이던 그를 지동설로 성큼 다가서도록 이끈 계기는 망원경 제작과 이의 활용이었다. 1608년 얀 리페르헤이라는 네덜란드인이 이 새로운 도구의 특허를 출원했다는 소식을 접한 갈릴레이는 이의 잠재적 유용성을 간파하고 성능 개량에 매진했다.

 

 

갈릴레이 망원경



1610년 초 갈릴레이는 수차례 실험 끝에 30배율로 성능을 높인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다. 이때 그는 물론이고 인류에게 신기원이 도래했다. 먼저 관측한 달의 모양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매끈한 공 모양이 아니었다. 달의 표면은 산과 분화구로 가득했다. 관측을 이어간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무려 4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는 목성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3개만 보이던 목성 주위의 작은 별들이 며칠 뒤에 4개로 늘어났다. 이는 목성 뒷면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천동설에 따르면, 모든 천체는 오로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해야만 했다. 그런데 목성을 중심으로 도는 천체가 있다는 사실은 기존의 우주론 설명체계에 무엇인가 결함이 있음을 암시했다. 완벽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중세의 하늘 세계에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이은 새로운 발견을 계기로 명성을 얻은 그는 이제 당대 천문학 분야에서 최전선에 있는 학자로 주목을 받았고, 그 덕분에 1610년 5월 피렌체의 실권자인 메디치 가문에서 주는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라는 영예로운 자리까지 얻게 됐다.

이제 강의 부담에서 벗어난 갈릴레이는 망원경의 성능 향상 작업에 몰두했다. 그 덕분에 곧 금성의 위상 변이와 토성의 타원 형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를 행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이어서 태양의 흑점 현상까지 관측한 갈릴레이는 1613년 『흑점에 관한 서한들』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기존 체제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그의 행보는 곧 교회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부각됐다. 위기를 느낀 로마교황청은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로 판결했다. 이제 비슷한 생각을 지닌 갈릴레이에게도 조만간 불똥이 튈 것은 분명했다.

 

갈릴레이의 저서-『대화』 표지.

 


그동안 신앙과 과학의 공존을 믿으면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해 오던 갈릴레이에 대해 드디어 교회가 행동을 개시했다. 그에게 로마로 출두해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거센 비난과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은 있었으나 당시까지 실제로 가해진 벌칙은 없었다. 교황을 비롯한 로마교황청 내 고위 인사들과의 친분 관계가 암암리에 도움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친구로서 1623년 신임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8세는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의 교의를 사실이 아닌 가설로 다루는 선에서는 연구결과를 자유롭게 출간할 수 있다는 언질까지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한껏 고무된 갈릴레이는 이후 6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1630년대 초반에 문제의 책인 『두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제목처럼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지지자와 코페르니쿠스 지지자 간에 벌어지는 논쟁 형식으로 구성돼 있으나 결국에는 태양중심설을 설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더구나 이 책은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발간돼 글을 아는 일반 대중에게도 지동설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책 속에서 어리석은 이론의 신봉자로 희화화돼 조롱거리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옹호자들과 무엇보다도 로마교황청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1632년 봄에 로마교황청은 인쇄업자에게 발간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어서 갈릴레이에게 로마로 출두해 자신을 변호하라고 명령했다. 고령과 중병을 내세우며 버티던 갈릴레이는 도와주리라 믿었던 교황 우르바노 8세마저 등을 돌리자 결국 1633년 2월 중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다각적인 변호 시도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정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이단 이론을 공개적으로 포기하라는 명령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7명의 종교재판관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지동설이라는 이단의 주장을 철회한다는 참회문을 읽었다.

공개적으로 치욕을 당했으나 다행히 얼마 후 종신형은 가택연금으로 감형됐다. 연금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역작이 될 마지막 저술인 『새로운 두 과학』의 집필에 착수, 마침내 1638년 이를 네덜란드에서 발간하는 데 성공했다. 이단 판정을 받은 처지인지라 국내에서는 책을 출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은 천문학이 아니라 물체의 운동법칙을 다룬 역학 관련서로 근대 물리학의 토대를 놓은 업적으로 평가됐다. 재차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당시 그는 완전 실명 상태에 있었다. 이후 피렌체 인근 거처에서 몇 년을 더 버틴 그는 1642년 1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건의 역사적 영향

과연 갈릴레이는 로마교황청에 맞서서 성서의 오류를 끝까지 지적하다가 고초를 당한 반(反)신앙의 과학자인가? 그의 일생을 조망해볼 때 오히려 갈릴레이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단지 종교와 과학의 공존 가능성을 줄기차게 믿고 견지해온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는 성서와 과학은 신의 진리를 달리 해석하는 방식에 불과할 뿐 서로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그가 평생 대항해 싸운 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고대 이래 불변의 진리처럼 떠받들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저작들은 그의 의도와 달리 당시 가톨릭교회의 사상적 토대를 뒤흔들고, 신적 권위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근대로의 문’을 열어젖히고 말았다.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접근방식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 세계의 속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했다. 이는 비단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천문학의 명제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넓게는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새롭게 보려는 지적 태도를 자극함으로써 서양인들의 일상생활 전 분야에 걸쳐 불합리성을 제거하고 진보를 추동했다. 비록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크게 외치지 못하고 독백했을지언정, 그가 심은 묘목은 조만간 거목으로 자라서 종교재판정 전체를 휘감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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