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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군사 >역사속 그때 그는 왜?

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한 절대군주, 종교 통일 꿈꾸다

<34> 1685년 국왕 루이 14세는 왜 낭트 칙령을 폐지했을까? (上)
2018. 09. 12   16:24 입력 | 2018. 09. 12   16:44 수정

“짐은 곧 국가다” 선언한 루이 14세

대규모 상비군 육성 군사력 강화

베르사유 궁전 짓고 영토 팽창 시도

신교도 종교 자유 허한 ‘낭트 칙령’

왕권신수설에 어긋난다 손보려 해

 

 

루이 14세의 초상화(이아생트 리고 작품).

 

16~18세기를 유럽사에서 ‘절대주의 시대(Age of Absolutism)’라고 부른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지방분권적이던 중세사회가 해체되고 권력이 국왕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했다. 중앙집권화 과정을 통해 영국에서는 튜더 왕가,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 오스트리아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 프로이센에서는 호엔촐레른 왕가가 출현했다.

이들 왕실은 경쟁적으로 대규모 군대와 장대한 궁전, 화려한 의식 등을 통해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들 중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절대군주는 바로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Louis ⅩⅣ·1638~1715)일 것이다. 사실 그는 채 다섯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 신하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간신히 국가를 통치하던 루이 14세는 22살 성년이 된 1661년 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하며 국가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베르사유 궁전 건축, 귀족에 대한 통제, 끊임없는 영토 팽창 시도 등 무한 권력을 뽐내던 그는 급기야 1685년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폐지하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그는 왜 자신을 ‘태양왕’이라 불렀을까? 그는 왜 관용의 상징이던 낭트 칙령을 폐지했을까? 그리고 루이 14세의 절대권력 추구는 당시 유럽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베르사유 초기 모습.

사건의 역사적 배경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시기는 유럽의 절대주의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던 시대였다. 용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왕권의 절대성을 추구한 절대왕정은 지방분권적이던 중세 봉건체제의 붕괴라는 격변 속에서 탄생했다.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한 봉건영주와 가톨릭교회의 위세가 빠르게 약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경제적 여건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봉건영주의 농촌 세력권 인근 교통 요지에 새롭게 터를 잡은 도시들이 성장하고 그 영향력이 주변 농촌으로까지 확산하면서 중세사회를 지탱해온 장원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1340년대에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엄청난 사람들이 죽으면서 유럽 인구가 급감했고, 그로 인해 노동인구의 부족 현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도 중세사회를 지탱해온 전사 계층인 기사 군의 위력도 크게 약화됐다. 십자군 원정(1092~1270), 백년전쟁(1338~1453), 영국의 경우 장미전쟁(1453~1483) 등 계속된 무력충돌로 인해 결과적으로 기사들의 수가 감소했고, 무엇보다도 소총과 대포 등 화약무기가 발전하면서 성곽과 기병에 의존한 중세 무기체계의 한계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왕권은 기존의 봉건영주 세력을 단독으로 당장 제압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국왕의 지원세력이 등장했으니, 이는 바로 점차 대두하고 있던 상공인 계층이었다. 교역과 여타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국왕이 봉건영주 세력을 제압하는 데 소요되는 재원을 충당해 주었다. 이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국왕은 강력한 군대를 육성해 봉건영주들의 산발적인 반발을 잠재우고 종국에는 충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들 상공인 계층은 강력한 왕권 아래 향후 왕국 내에서 통일된 경제권이 확립되고 그 안에서 자신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으리란 기대 아래 국왕과 결탁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국왕과 시민계급 간 이해관계의 합치가 장기간 지속되지는 못했다. 18세기 중엽 이래 갈등이 고조되면서 종국에는 혁명을 통해 왕권은 제거되고 이어서 근대 국민국가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절대왕권은 거대한 궁전이나 화려한 복장과 의식 등 겉으로 드러나는 하드웨어적 측면으로 자신의 권한을 공고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국왕이 더욱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오히려 소프트웨어 쪽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내세우면서 통치의 이론적 기반을 강화했다. 문자 그대로 국왕의 통치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이기에 주권은 국민이 아니라 국왕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원리를 딛고서 루이 14세는 ‘국가, 그것은 바로 나다’라고 호언했던 것이다. 그의 장담이 허풍이 아님은 군사력의 증강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왕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제압해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고,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목 아래 대규모의 상비군을 육성했다. 이에 소요되는 재원은 조세제도의 정비 및 징세 강화, 대외교역의 장려 등을 통해 충당했다.

이러한 외적 조치들에 더해 절대왕정은 문화 활동 및 종교 생활을 통해 ‘신민(臣民)의 동질화’를 꾀했다. 국내적으로는 장엄한 각종 의식이나 국가적 행사 거행 및 웅장한 궁전 건축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신민의 결속을 다지고 국왕의 영광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특히 종교계의 협조로 국왕의 신적 권위를 고양함과 동시에 신민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 준수를 강조하고, 국가종교가 정한 테두리에서 벗어나려는 신도들을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응징했다. 한마디로 지배계층의 문화를 신민에게 강제해 문화적 일체감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굳건하게 유지하고자 했다.

절대주의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꼽을 수 있다. 영국과 벌인 백년전쟁, 국내의 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왕권을 강화한 부르봉 왕조는 ‘태양왕’으로 자칭한 루이 14세의 치세 동안(재위 1643~1715)에 절대왕정의 절정을 이뤘다. 그는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통해 절대군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파리 근교에 베르사유 궁전을 신축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의식을 정례화해 몸소 실천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이른바 ‘인간 태양’인 자신의 빛을 받아야만 했다. 반대로 모든 신민은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듯이 한없는 은총을 베푸는 국왕을 우러러보아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태양계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배열해 있듯이, 인간 태양인 자신을 중심으로 국가의 모든 분야가 질서정연하게 본연의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루이 14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목표에 여전히 부합되지 않는 사안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프랑스의 종교적 통일성 결여였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인데 바로 이 근원이 통일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프랑스 역사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나, 이후 프랑스 왕국 내에는 소수지만 위그노라 불리는 칼뱅파 신교도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 왔다. 결국 가톨릭과의 갈등 고조로 부르봉 왕조 성립 시까지 서로 간에 죽이고 죽는 유혈극이 이어져 왔다. 가까스로 앙리 4세가 이른바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공포해 신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인정해줌으로써 혼란 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의 정신적 통일까지 바란 루이 14세가 이를 재고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차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다면 도대체 ‘낭트 칙령’이 무엇이기에 루이 14세는 이를 손보려고 했을까? 그의 조치가 이후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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