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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군사 >역사속 그때 그는 왜?

죽음의 전염병 페스트, 유럽인 절반 목숨 앗아갔다

<18> 1348년 유럽은 왜 흑사병에 초토화됐을까 (下)
2018. 05. 16   17:17 입력




전염성 강해 2~3년 사이 바다 건너 런던까지 유럽 전체로 확산
감염되면 발작·구토·환각 증세 보이다 대부분 일주일 안에 사망
공포에 질린 사람들, 질병 유포자로 이방인 지목…무고한 희생 불러


흑사병의 파괴력과 당대인들의 반응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Kaffa)를 통해 서유럽으로 상륙한 흑사병이 이후 초래한 결과는 파국 그 자체였다. 그 무서운 위력 앞에 당대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질병으로 죽은 자가 당시 서유럽 전체인구의 3분의 1에 이를 정도였다. 마을과 도시마다 시체가 넘쳐났고 평민, 권력자, 심지어 성직자도 무사할 수 없었다.

전염성이 너무 강해서 심지어 환자와 말만 섞어도 감염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이 병이 왜 생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퍼지는지 알 수 없었기에 기도 외에는 달리 묘책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질병의 확산 속도였다. 인간의 이동과 함께했기에 외부와 교역이 이뤄지는 도처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먼저 해안의 항구를 기습했고, 이어서 내륙지방으로 이동해 불과 2~3년 사이에 유럽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1346년 이탈리아 남부의 교역항 메시나에 상륙해 몇 달 안에 제노바나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로 퍼진 전염병은 상선 교역로를 따라 파리, 저지대, 런던 등지로 확산했다. 특히 당시 서유럽 지역은 지구 상 어느 곳보다도 인구밀도와 도시화가 높았기에 감염이 빨랐다. 1349년경에는 중북부 유럽에까지 도달했다.

일단 감염되면 발작과 구토, 환각 증세 등을 보이다가 대부분 일주일 안에 사망했다. 더구나 망자(亡者)의 시신 곳곳에 검은 반점이 생겨나 섬뜩한 공포를 자아냈다. 사방에 주검이 넘쳐났고, 수많은 소도시와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운 좋게도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당대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는 “점심은 친구와, 저녁은 조상과 함께”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흑사병이 강타한 이탈리아의 소도시 피아첸차의 상황을 기록한 한 사료의 내용은 더욱 처절하다: “공동묘지로는 부족했다. 시신을 매장할 구덩이를 곳곳에 파야 했다. 일가족이 한 구덩이에 묻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근 도시와 마을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 가공(可恐)할 전염병에 대한 당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질병의 원인으로부터의 도피와 이방인에 대한 배척이었다. 우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실행할 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은 도시를 탈출해 시골로 숨어들었다. 부득이 도시에 남게 된 자는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오염된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했다. 신실한 자들은 이 질병을 “죄인에 대한 신의 분노”로 인식했다. 따라서 피가 날 정도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苦行) 의식으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했다. 이처럼 히스테릭한 행위들이 유행하자 1349년 교황은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개인 차원의 반응과 달리 집단적 발작은 또 다른 무고한 희생을 불러왔다. 해당 사회의 소수자(집단)나 이방인에 대한 배척과 탄압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낯선 자를 질병 유포자로 보았다. 특히 당시 동방과의 교역에 주로 종사했던 유대인이 주 공격대상으로 지목됐다. 흔히 그러하듯이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서 질병을 유발했다는 뜬소문이 횡행했다. 점차 유럽 전역에 걸쳐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현실화됐다. 어떤 유대인들은 무조건 죄를 자백하라는 고문을 당했고, 다른 유대인들은 심지어 불에 타 죽기도 했다. 유럽 내 수많은 지역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공격을 당했지만, 이들 중 가장 심각한 박해는 프랑스 북동부의 교역 중심지였던 스트라스부르에서 벌어졌다.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이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수천 명이 학살되고 추방당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급기야 1348년 6월 교황 클레멘스 6세(재위 1342~1352)가 사태 수습에 나섰다. 교황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보호하라는 요지의 서신을 각지로 보내 유대인에 대한 폭력행사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만연한 죽음 앞에서 이성을 상실한 군중에게 이는 한낱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었다. 흑사병이 창궐한 4년 동안 당시 유럽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5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인구 감소는 곧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이 서양 역사에 미친 영향


흑사병의 여파는 전방위적이었으나 무엇보다도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흑사병이 크게 창궐한 1348~1350년 무수한 사람들이 죽으면서 곡식은 들판에서 썩었고, 제조업은 중단됐으며 외부세계와의 교역망도 와해됐다.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가격은 급등했고, 생존자들의 생활여건은 더욱 열악해졌다. 하지만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면서 상황은 반전(反轉)됐다. 살아남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랄까. 곡물 생산량은 줄었으나 이를 소비할 인구가 더욱 큰 폭으로 감소했기에 곡물 가격은 하락하고 임금은 상승했다. 노동자들의 식단은 풍성해졌고 생활은 안정됐으며, 더불어 사회 내에서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대지주의 대응방식은 지역마다 약간씩 달랐다. 서유럽에서는 소작농에게 추가로 무상 노동을 요구하거나 이른바 ‘금납제(金納制)’로 전환했다. 그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영주의 땅을 이탈,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사회적 유동성이 높아진 서유럽과 달리 인구가 희박했던 동유럽에서는 농민들이 재차 중세의 농노 신분을 강요당하는 이른바 ‘재판 농노제(再版 農奴制)’가 출현했다. 발트해를 통한 대규모 곡물 수출이 주 수입원이던 대지주들은 증가하는 곡물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이 절실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흑사병이 초래한 새로운 사회변화가 모두에게 유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항상 그러하듯이 변화의 조짐을 간파하고 그 흐름에 동참하거나 적어도 순응하는 자는 풍요를 누렸으나 그러지 못한 자는 더 심한 곤경에 처했다. 아니나 다를까, 1350~1425년 중세 유럽은 수백 건에 달하는 대중 반란으로 몸살을 앓았다. 예컨대 1358년 프랑스 파리 인근 농촌에서 일어난 ‘자크리’ 농민반란에서부터 1378년 피렌체에서 모직산업 노동자들이 주도한 ‘치옴피의 난(亂)’ 및 1408년 북유럽의 무역도시 뤼베크에서 터진 도시민 반란까지 다양했다. 물론 기존 체제에 대한 이들의 저항은 대부분 실패했으나, 이때 확립된 대중 반란의 전통은 이후 200년 이상 유럽인의 삶 속에서 ‘자유’를 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14~15세기는 유럽인에게 고난과 역경의 시대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기근과 흑사병은 당대 인구의 거의 절반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백년전쟁과 같은 이 시기 무력충돌은 이러한 고난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유럽 문명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어둠의 시기에도 용기와 희망을 품고 흑사병에 맞서 싸운 중세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고로 어떤 면에서 중세 말기는 서양문명의 쇠퇴기가 아니라 역경에 굴하지 않고 유산(遺産)을 지켜낸 창조와 혁신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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