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1963 감독: 니콜라스 레이/출연: 찰턴 헤스턴, 에바 가드너, 데이비드 니븐
청일전쟁 후 외세에 대한 증오심 가득했던 청나라, ‘외세 배척’ 의화단 결성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과 충돌… 북경 자금성 배경으로 55일간 전투 그려
청나라는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의 패배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어진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과의 불평등조약은 쇠락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자강(自强)을 꾀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도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는 청나라를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했다.
‘부청멸양’ 내걸고 외세문물 파괴한 의화단
열강의 침략, 부패하고 힘없는 조정, 청일전쟁 배상금 등은 중국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대륙에는 외세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다. 이때 나타난 외세배척 비밀결사 조직인 의화단(義和團)은 들불처럼 대륙으로 번져나갔다.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구호를 내걸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와 기독교인을 살해하며, 철도 등 서양의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1900년 6월, 의화단이 맹위를 떨치자 실질적인 통치자 서태후(西太后)는 재빠르게 의화단을 지지하며 대외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8개 열강은 연합군을 구성해 베이징을 공격, 진압했다. 이것이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이다.
외국인 거주지역 사수하는 연합군과 충돌
영화 ‘북경의 55일’은 의화단과 영국·미국 등 서구 연합국 간에 벌어진 55일간의 전쟁을 그렸다. 여기에 미 해병대 소령과 한때 러시아 사령관 부인이었던 간호사 간의 러브 스토리를 입혔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프랑스·미국 등 열강들의 국가가 경쟁하듯 연주되자 북경의 한 주민은 귀를 막으며 “왜 이리 풍악을 울리고 난리야?”라고 짜증을 낸다. 그러자 같이 식사하던 노인이 “중국을 서로 차지하려고 그러는 거지”라고 말한다. 이렇듯 영화는 북경 자금성을 배경으로 외국인 거주지역을 사수하려는 연합국 측과 의화단의 대립을 그리면서도 중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속셈을 보여준다.
1900년 여름, 청나라를 차지하려는 서구 열강들의 다툼이 한창인 가운데 의화단의 세력이 거세지자, 북경 주재 외국인들은 대피를 서두른다. 영국을 도우려고 베이징에 도착한 미 해병대의 루이스 소령(찰턴 헤스턴)은 호텔에서 러시아 사령관의 부인이었던 나탈리(에바 가드너)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열강 8개국 대표자들은 연합군 병력이 적은 것을 알고 불안해 떠날 것을 의결하지만, 영국 대사(데이비드 니븐)는 시드니 장군이 도착할 때까지 북경에 남을 것을 주장한다. 결국, 모두 베이징을 사수하기로 결정한다. 루이스와 간호사가 된 나탈리 간의 사랑도 깊어간다.
한편 서태후는 의화단에 시드니 장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령한다. 북경에 고립된 연합국의 전세는 점점 나빠지고 아편(환자 치료용)을 구하러 가던 나탈리도 총탄을 맞고 죽게 된다. 하지만 결국 시드니의 군대가 북경 입성에 성공, 의화단을 섬멸한다.
1963년 제작 영화, 북경 대신 세트서 촬영
영화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대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의화단 사태가 급박해지면서 영국 대사 부부가 북경에 더 체류할 것인지를 얘기하던 중 부인이 나폴레옹의 말을 빌려 “중국은 재워야 한다. 깨우면 세계가 떨게 된다”라고 말한다. 중국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이 대사는 오늘날 G2가 된 중국의 위상을 잘 대변하는 듯하다.
영화 끝 부분, 의화단이 전멸하고 위기를 느낀 서태후가 혼자 궁 안에 앉아 한탄하며 “누가 (우릴) 도와줄 수 있을까? 청나라는 끝났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부패하고 힘없는 국가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태후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후 아들 광서제가 죽고(1908) 손자 부의(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워 세 번째 수렴청정을 하려 했으나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이 영화는 제임스 딘이 출연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유명한 니콜라스 레이가 감독을 맡고 찰턴 헤스턴, 데이비드 니븐, 에바 가드너 등 당대의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했으며 전쟁 영화답게 스케일도 커 화제가 됐다. 1963년에 제작된 추억의 영화인 셈인데 당시는 냉전 체제여서 주 무대인 북경에서 찍지 못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서구 제국주의 미화했다는 비판 있어
영화가 오리엔탈리즘 시각으로 그려졌다는 비난에선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의화단은 악(惡), 연합국은 선(善)’ 식으로 구분,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미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연합국에 일제가 포함돼 있어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화단 사건이 있기 직전까진 의화단이 중국에 거주하는 서구 민간인에게 살인 등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고, 사건 이후엔 일본 등 연합국 일부가 중국인들에게 갖은 만행을 일삼았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의화단이든, 열강의 연합국이든 점령하면 무자비한 보복을 주고받은 셈이다. 착한 전쟁은 없다.
<김병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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