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만주서 비밀리 구입한 소총 ‘의병봉기’ 힘이 되다

입력 2017. 05. 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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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범윤, 아니시모프에게 ‘소총 반환’ 요구하다


이범윤,러일전쟁 후 러 압수한 한인 소총 반환 요청에

아니시모프 장군은 러·일 평화협정 체결로 요구 거절

 

 



최재형과 연해주 한인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갔던 이준의 사망 소식에 격분했다. 이준이 헤이그로 떠나기 전에 연해주 한인들에게 했던 연설이 매우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더 안타까워했다. 이에 한인들은 이준의 뜻을 계승하기로 하고 공진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범진 , 엄인섭에게 편지로 의병봉기 촉구

이 소식을 들은 이범진 러시아 공사는 재러 동포들과 함께 러시아의 힘을 빌려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신문사를 세우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장지연을 초빙해 일본의 통감정치를 공격하며 조선에서 일본인을 몰아내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이 창간되자 이범진은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간행을 축하하고 재정적 후원을 하면서 일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 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엄인섭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봉기를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사진은 엄인섭과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오른쪽) 장군.

 


이범진은 연해주 한인들 중 특히 이범윤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때마다 편지가 안전하게 도달하도록 연해주 군무지사의 손을 거쳐 배달되도록 했다. 이범진 공사는 편지에서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서 일거에 함경도를 거쳐 계속 몰아쳐서 한성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범윤이 이범진 공사에게 엄인섭을 소개하자 1907년 7월 10일 이범진은 엄인섭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했다.



‘엄인섭 인형(仁兄)께’

관리영감(이범윤)의 서한을 통해 귀하의 성명과 국사에 진력하려는 뜻을 매번 전해 들었습니다. 한 번 만나 뵙기 희망하던 차에 다행히도 귀하가 보내신 편지를 접하여 대단한 기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후 더욱 건승하시어 국사에 진력하시고 관리영감에게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어쨌든 동심협력하여 열성으로 일을 처리하여 일본에 대한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함을 뜻하여 밤낮으로 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한심 통곡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금후로는 때때로 서신을 통하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귀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광무 11년(1907) 7월 10일 러시아력 6월 27일 이범진

그러나 엄인섭은 나중에 일제의 밀정이 되어 변절자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군인·의병도 항일 의병봉기 요청

국내에서 일본이 군대를 해산시키자 러시아로 건너온 대한제국의 군인들과 의병 세력들도 이범윤을 찾아와 항일 의병봉기를 요청했다. 일본의 1908년 11월 26일 자 첩보 보고에 그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범윤은 얀치혜에 거주하는 굴지의 부호 최도헌, 즉 최재형(원래 경흥부의 한 빈민)이 설립한 사립학교의 교사였던바, 작년 경성의 변에 의하여 해산된 병정 및 폭도 패주자들이 찾아와 호소하기에 이르러 최도헌 기타의 동지자도 또한 이범윤에게 폭동을 권고하고 최도헌으로부터 군량 자금의 공급 약속을 받고 왕년 이범윤이 태황제 폐하로부터 하사받은 유척, 마패를 이용하고 또 격문을 발하여 부하 최병준, 박모(러시아명 알렉산드르), 엄인섭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음.’



이 문서를 보면 이범윤은 최재형이 세운 사립학교에서 교사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최재형으로부터 군량 자금과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사실을 일본은 모두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범진 공사, 1만 루블 최재형에게 후원

이범윤은 최재형이 지원한 1만3000루블을 확보하고 의병조직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함경도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 얀치혜에는 의병들과 조선의 전직 정규군인도 40여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의병들이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소총이 필요했다. 이범윤은 전직 황제근위대 대위였던 김인수와 함께 러일전쟁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아니시모프 장군을 찾아갔다.

이범윤과 김인수는 일본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할 목적으로 무기가 필요하니 러일전쟁 후 한인 의병대원들에게서 압수한 소총을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아니시모프 장군은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므로 어떤 경우라도 한인 반란군을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인들은 비밀리에 만주에서 소총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1908년 4월 이범진 공사도 얀치혜에서 의병봉기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연해주 의병조직을 후원하기 위해 러시아 귀족인 놀켄 남작과 아들 이위종을 동행시켜서 1만 루블을 최재형에게 보낸다. 놀켄 남작은 이위종의 장인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수도를 출발해 최재형의 집으로 갔는데 이러한 상황을 러시아 국경지대 관리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전 조선공사의 아들이 왔다.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리위종)라고 한다. 그는 놀켄 남작(토볼주 총독이었던 것으로 여겨짐)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자기 장인과 함께 왔다. 그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유명한 고려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과 러시아 귀족인 이위종의 장인 놀켄 남작이 연해주에 나타나자 한인들은 크게 용기를 얻었고 국경지대의 러시아 국경수비대는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작가/ 안중근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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