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공군, 단독출격 성공신화
총 22대 경비행기로 6·25전쟁 맞은 우리 공군
美에서 F-51D 10대 인수 받아 7월 3일 첫 비행
1951년 8월 공군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편 창설
10월 11일 김영환 대령 지휘 아래 역사적인 단독 출격
전투능력도 향상… 승호리철교 차단 등 성공 거둬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우리 공군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육군항공부대(1948. 7. 12)로 출발해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으로 탄생했지만 전투기 한 대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에 크게 성장해 독립작전을 수행하게 됐고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도 39명이나 배출했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은 김정렬 대령(1950.5.14 준장)이다.
공군은 창설 초기 L-4 연락기 8대, L-5 연락기 4대로 출발했다. 그리고 국민성금으로 캐나다에서 구입한 AT-6 훈련기(건국기라고 명명) 10대 등 총 22대의 경비행기로 6·25전쟁을 맞이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Yak-9 전투기, IL-10 전투기 등 226대의 항공기와 28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남북 공군 전력은 비교도 안 됐다.
북한 공군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당일 10시부터 Yak-9 전투기 2대가 여의도와 김포 공항 상공을 정찰한 후, Yak-9 전투기 4대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여의도비행장과 용산역 등을 폭격했고, 16시에는 김포비행장을 폭격해 미군 C-54 수송기 1대를 파괴했다.
이에 미군은 다음날인 6월 26일 일본에 있던 무스탕(F-51) 전투기와 F-80 전투기를 한국전선에 출격시켜 북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게 됐으며, 27일 하루 동안 적기 7대를 격추했다. 한국전쟁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8일 미 공군을 한국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의, F-80 전투기와 B-26 폭격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첫 임무는 미 공군과 함께 ‘공지합동작전’전쟁이 발발했으나 우리 공군은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으므로 미 공군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7월 2일 비로소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해 대구기지에 도착했다. 다음날 첫 비행이 시작됐다.
첫 임무는 1950년 7월 3일 대구 동촌비행장(K-2)에서 출격, 미 공군과 함께 지상군 전투를 지원하는 ‘공지합동작전’이었다. 주로 북한군의 통신과 보급로를 마비시키고 38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미 공군은 북한 공군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세해 처음부터 제공권을 장악하게 됐다. 그러나 우리 한국 공군은 훈련이 부족해 7월 4일 안양·시흥지구 폭격에 참가했다가 이근석(李根晳) 대령(비행단장)이 대공포를 맞았다. 이 대령은 귀환이 불가함을 알고 적 탱크에 돌진해 자폭했고 전투기 조종사로서는 최초의 전사자가 됐다. 이근석 대령이 전사하자 조종사들의 교육훈련이 보강됐다. 조종사들은 진해기지로 이동해 미 공군으로부터 사격술, 회피기동, 적 지상군 식별법, 신호 방법 등 다양한 교육을 받고 8월 15일부터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
1951년 10월부터 강릉기지 근거로 독립작전 시작우리 공군은 미 제5공군의 작전지휘를 받아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 공군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김정렬(金貞烈) 공군참모총장은 독립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1951년 8월 1일 공군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편 창설(초대단장 장덕창 준장)하는 한편 F-51 전투기 12대와 T-6기 1대를 사천기지에서 강릉기지로 전진 배치시켰다. 그리고 미 공군의 지원 없이 우리 공군 단독으로 ‘독립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받기 위해 1951년 9월 미 제5공군에 작전준비태세검열을 요청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1951년 10월부터 강릉기지를 근거로 독립작전에 들어갔다.
1951년 10월 11일, 역사적인 단독출격이 시작됐다.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金英煥) 대령 지휘 아래 1편대는 김영환 대령 자신이 편대장을 맡았고, 2편대는 김두만 대위, 3편대는 강호륜 대위, 4편대는 정영진 대위가 맡아 임무에 들어갔다. 주로 북한군 보급로 폭파, 적 차량 및 탱크 폭파, 고사포진지 폭파 등이었다. 첫 단독출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단독출격(1951.10.11∼11.28)으로 이루어진 독립작전에서 대한민국 공군은 총 48일 동안 493소티를 출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1951년 6월 미 공군으로부터 F-51 전투기 10대와 C-47 수송기 1대를 추가로 지원받아 항공기 숫자가 총 48대로 늘어났고 공군비행장도 증가돼 1951년 10월 사천·강릉·동명·속초비행장 등이 공군기지로 이용됐다. 전투능력도 크게 향상돼 김두만·이기협·옥만호·정주량·박재호·윤응렬 등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도 39명이나 배출됐다.
평양 대폭격 작전 등 수행… 총 8457소티 출격공군의 독립작전은 평양 승호리철교 차단 작전, 송림제철소 폭격 작전, 평양시 대폭격 작전, 고성 351고지 작전 지원, 공비토벌작전 지원 등에 집중됐다.
①승호리철교 차단 작전: 대동강의 지류 남강에 설치된 승호리철교는 적 보급로의 핵심으로 반드시 폭파해야 했다. 미 공군이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8000피트 고공에서 폭탄을 투하해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한국 공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김신 대령은 1952년 1월 12일 4000피트에서 저공비행하다가 1500피트로 급강하하며 500파운드 폭탄 12발을 투하해 마침내 철교를 폭파했다. 미 공군이 하지 못한 것을 우리 공군이 해낸 것이다.
②송림제철소 폭격 작전: 송림제철소는 150t급 용광로 3기와 200t급 용광로 2기가 있었던 한국 최초의 제철소다. 전쟁 초기 B-29와 B-26이 폭격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1952년 3월 28일 옥만호(玉滿鎬) 대위가 지휘하는 F-51 전투기 2개 편대가 나흘 동안 61소티를 출격해 완파했다.
③평양 대폭격 작전: 평양 대폭격 작전은 1952년 7월 11일 시작됐다. 30개 군사 목표물에 대한 폭격이었다. 미 공군이 지휘하고 한국공군은 작전구역을 할당받았다. 편대장 강호균 소령, 전봉희 소령, 오춘목 소령이 각각 1개 편대씩 지휘하여 3개 편대가 총 36소티 출격으로 대동강 철교 서쪽의 평양 금속공장과 곡산 공장지대를 완파했다.
독립작전 결과 적 병참기지 파괴 1330개소, 벙커 파괴 845개소, 연료저장소 파괴 43개소, 탄약고 파괴 21개소, 포진지 파괴 630개소, 철도 파괴 1051개소, 화차 및 기관차 파괴 59량, 공장건물 파괴 93동, 동굴 파괴 106개소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한국공군은 1951년 10월 독립작전에 들어간 이후 미 공군작전의 5.3%를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휴전 성립 당시에는 F-51 전투기 80대를 비롯해 총 118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됐으며, 1953년 2월 강릉기지에서 제10전투비행단을 창설함으로써 2개의 전투비행단을 보유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막강한 공군으로 성장했다.
전쟁 기간에 우리 공군은 총 8457소티를 출격했는데 그중 5337소티(63%)는 적 후방지역 차단 작전, 2656소티(31%)는 근접항공지원작전, 464소티(6%)는 기타 작전이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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