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태학에서 벗들을 사귀다
태학 둘러보다 우연히 만난
법원장 지낸 70세의 윤가전
37세의 귀주안찰사 기풍액
수학 중인 54세 왕민호 등과
열하에서 닷새 동안 필담 나눠
태학이란?
연암은 열하일기에 1780년 9월 3일 오전 연경에서 출발해 9월 7일 오전 고비사막(漠) 북(北)쪽에 있는 열하의 태학에 도착할 때까지, 만 4일 동안 여행 일정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또한, 9월 7일 오후부터 태학에서 청나라 지성인들과 사귀고, 건륭제 생일 축하행사 참관 후, 9월 12일 저녁 열하를 떠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을 때까지의 행적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이란 제목으로 실었다.
태학은 조선의 성균관처럼 과거의 제1차 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제2차 시험인 대과를 공부하던 곳이다. 열하의 태학은 20세기 중반에 허물어져 현재 복원되었다고는 하나 옛 모습이 아니다. 또한, 열하일기에는 ‘승덕(열하)태학기’가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연암은 열하와 연경의 태학은 제도가 같으며, 조선의 성균관과 유사하다고 했다. 따라서 태학은 성균관처럼 청나라의 과거 제1차 시험 합격자인 거인(擧人)들이 공부했던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의 원류인 태학은 국자감 혹은 국학 등으로도 불렸다. 건물은 학문을 강의하고 연구하던 명륜당과 기숙사 등 부속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사절단이 묵었던 곳은 기숙사다. 태학은 공자와 그 제자를 모시는 문묘와 함께 건립되었으며, 문묘의 가장 중추적인 건물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다.
연암은 태학에서 닷새가 조금 넘게 머무르는 동안 낯선 벗들과 필담을 나눈 내용과 건륭제 생일 축하행사를 계기로 보고 느낀 바를 태학유관록을 비롯한 13편에 나누어 정리했다. 이는 총 25편으로 구성된 열하일기의 절반 분량이며, 요즘 책으로는 500쪽이나 된다.
열하에서 사귄 벗들
9월 7일 오후 사절단 일행은 고된 여행의 피로 때문에 녹초가 되어 대부분이 숙소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연암은 태학을 둘러보았다. 그때 웬 노인이 인사를 건넨 후 벼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조선사절단 대표를 수행 중이며 벼슬은 없다고 하자, 그는 윤가전(尹嘉銓)이라고 이름을 밝힌다. 그리고 법원장을 지내고 퇴직했다면서 사절단 대표의 이력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이때 곁에 있던 기풍액(奇豊額)이라는 인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10년 전,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지금은 귀주안찰사라면서 “조선의 농사가 올해 어떤지”를 물었다. 또한, 과거 제1차 시험인 거인시 합격자로서 늦은 나이에 태학에서 공부 중이라는 왕민호(王民호)도 대화에 합류했다.
얼마간 필담을 나눴을까? 윤가전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붉은 명함과 자기가 집필했다는 책을 연암에게 준다. 그러면서 사절단 대표를 뵙고 싶다면서 어느새 의관을 갖추고 염주를 목에 건 채 연암을 따라나섰다.
다소 당황스러웠던 연암은 대표에게 조심스레 사연을 전했으나, 예상대로 대표로부터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꾸지람을 받았다. 연암은 노인에게 다음 기회에 대표께서 직접 찾아뵐 것이라고 둘러댔고, 노인은 어색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조금 후에 청나라 관리들이 사절단 대표를 찾아와서 건륭제에게 생일 축하 예절을 행할 날짜와 시간, 그리고 배석할 위치에 대해 통보해 주었다. 9월 8일 오전 4시에 대표는 청나라 장관급, 부대표는 청나라 차관급 자리에 서서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라는 것이었으며, 서장관은 명단에서 빠졌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때와 달리 황제가 과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저녁 후, 연암은 다시 윤가전의 숙소로 갔다. 마침 그는 기풍액과 대화 중이었다. 연암은 그들에게 청나라에서 편찬된 명나라 시집 ‘명시종(明詩綜)’에 조선인에 관한 기록이 잘못 기재됐다고 지적해 주었다. 월사 이정구의 호가 율곡으로 잘못 표기됐으며, 허봉과 허균의 누이이자 시인인 허난설헌이 여자 도사로 소개됐다는 것 등이다.
이때 사절단 대표의 하인이 찾아와 늦었으니 잠자리에 들자고 하자, 연암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연암과 윤가전
앞에 언급된 세 사람은 열하일기에 자주 등장하며, 열하일기의 ‘경개록(傾蓋錄)’에는 이들을 비롯한 연암이 열하에서 필담을 나눈 인물 11명의 이력이 등장한다. ‘경개’란 우연히 만나 친한 벗처럼 된다는 의미다.
1) 왕민호는 호가 혹정이며, 나이는 54세였다. 사람됨이 매우 수수해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하인을 하나 두고 있었으나, 살림이 궁핍해 근심이 많은 듯 가끔 한숨을 내쉬곤 했다.
2) 윤가전은 호가 형산이며, 나이는 70세다. 법원장급의 벼슬인 대리 시경으로 은퇴했으며, 건륭제로부터 장관급이 쓰는 관모와 의복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학식이 높고 시와 글씨, 그림에 조예가 깊다.
3) 기풍액은 호가 여천이며, 나이는 37세다. 귀주안찰사이며, 원래 조선 사람이다. 조상의 본성은 황(黃) 씨다. 학문에 능하고 또 해학에 넘쳤으나, 교만하며 공공연히 윤가전을 무시했다.
참고로 윤가전은 연암에게 가장 따뜻하게 대해줬던 인물이다. 그러나 연암이 처음 만났을 때 당혹했던 것처럼 그는 막무가내고 공명심이 컸던 것 같다. 청나라 역사책은 연암과 작별한 지 1년 후,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781년 5월 윤가전은 건륭제에게 자기 아버지에게 시호를 내려주고, 문묘에 신주를 모셔줄 것을 건의했다. 건륭제는 터무니없다며 화를 내고, 다시는 무례한 짓을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윤가전은 또다시 상소했다. 건륭제는 얼굴이 파랗게 될 정도로 분노하며 그를 엄벌에 처하도록 명령했고, 신하들은 상소문 중에서 죄가 될 130여 곳을 찾아냈다.
결국 윤가전은 ‘불경죄’ ‘위선자’ 등의 죄를 뒤집어썼는데, 가장 큰 죄는 ‘고희죄(古稀罪)’였다. 건륭제가 70세 되던 1780년에 스스로 ‘고희노인’이라고 천명했는데, 건방지게도 윤가전이 상소문에 자기를 ‘고희노인’으로 칭했다는 것이다. 윤가전은 가까스로 능지처참을 면하고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가 저술한 79종류의 책은 모두 소각됐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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