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연암의 코끼리론
“몸뚱이는 소와 비슷한데, 꼬리는 당나귀 같고…”
길에서 만난 코끼리 상세 묘사 변화무쌍한 자연의 이치 논하며
불변의 이치 안다는 지식인 꾸짖어
진기한 공물
1780년 9월 6일 오후, 연암 박지원은 삼도량이라는 고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합라하 강을 건넜다. 해가 질 무렵에는 높은 고개를 넘었다. 산길은 공물을 싣고 열하로 향하는 수레와 가마들로 붐볐다. 수레에는 모두 노란색 작은 깃대가 꽂혔으며, 깃발에는 공물을 바친다는 뜻의 ‘진공(進貢)’이란 글자가 쓰여 있다.
연암에게는 옥으로 만든 그릇이나 보물뿐만 아니라 세계 방방곡곡에서 호랑이·표범·곰·여우·순록 등도 실려 오는 것이 신기했다. 말만큼 커다란 러시아의 개, 낙타와 모습이 비슷하고 하루에 120㎞를 달린다는 타조도 보았다. 또한, 태평차를 타고 가는 개코원숭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인을 닮았으며, 키는 겨우 60㎝ 남짓하다. 원숭이처럼 털이 난 손에 접는 부채를 들었는데, 얼핏 보니 얼굴이 예뻤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노파처럼 요사스럽고 흉악하게 생겼다. 수레의 휘장을 걷어 올리고 좌우로 쳐다보는 눈은 잠자리 눈처럼 크고 징그러웠다. ‘산도’라는 이름의 이 동물은 남방에서 왔으며, 사람의 마음을 금세 알아차린다고 한다.”
코끼리 이야기
무엇보다도 연암을 흥분시킨 짐승은 코끼리였다. 그는 연경에서도 코끼리를 열여섯 마리나 보았으나, 모두 쇠 족쇄로 발이 묶여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열하로 가는 길에서 뒤뚱거리면서도 비바람처럼 빨리 걷는 코끼리 두 마리를 목격한 것이다. 바로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열하일기 중 ‘코끼리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은 그래서 남다르다.
“몸뚱이는 소와 비슷한데, 꼬리는 당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 호랑이 발굽을 가졌다. 털은 짧고 회색이며, 모습은 인자하고, 구슬픈 소리를 낸다. 귀는 마치 구름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앉은 듯하고, 눈은 초승달 같다. 양쪽 어금니는 각각 굵기가 두 손으로 잡을 정도이고, 길이는 2m 남짓이다.
어금니보다도 더 긴 코는 굼벵이처럼 돌돌 말리며, 자벌레처럼 오그라지고 펴지기도 한다. 먹을 때는 누에의 꼬랑지같이 생긴 코끝으로 족집게처럼 물건을 잡거나 끼운 다음에 코를 말아서 입에 넣는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이치
코끼리를 연암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문장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이 있다. ‘코끼리 이야기’에는 기묘한 코끼리의 모습을 통해 변화무쌍한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려는 참지성인의 열정이 넘쳐흐른다.
연암은 우선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리는 지식인들에게 도전한다.
“한탄스럽도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털끝보다도 미세하더라도 하늘의 뜻에 따라 생성된다고 말한다. 즉, 이(理)와 기(氣)가 하늘의 조화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만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뿔을 가진 놈에게는 날카로운 이빨을 주지 않았다’면서, 마치 조물주가 만물을 창조할 때 의도적으로 하나씩 결함을 갖도록 한 것처럼 떠든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숫집에서 맷돌로 밀을 갈면 미세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바닥에 떨어진다. 맷돌은 그저 도는 일만 할 뿐이지, 어찌 곱거나 거칠게 만드는 데 뜻을 두겠는가?”
하늘이 소·말·개 등 동물에게 이빨을 준 것은 손이 없으므로 몸을 구부려서 씹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자칭 지식인들에게 연암은 코끼리의 이빨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하늘이 준 이빨은 코끼리에게 오히려 씹는 데 방해가 되며, 용·봉황·거북·기린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코끼리가 호랑이를 만나면 코로 쳐서 죽이니, 그 코는 천하무적이지만,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을 몰라서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쥐가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간이 하늘을 다르게 부르는 것도 주목한다. 1) 형체가 큰 것[大] 중에서 으뜸[一]이라고 ‘천(天)’ 2) 성질이 마르다고 건(乾) 3) 일을 주재한다고 임금 제(帝) 4) 묘한 작용을 일으킨다고 신(神)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연암은 하늘 자체도 제멋대로 부르는 자들이 어떻게 불변의 이치를 안다고 떠드는지 모르겠다고 꾸짖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코끼리가 창조된 이치도 알 수 없는데, 코끼리보다 몇만 배나 많은 천하의 모든 사물의 이치를 어떻게 알겠는가? 성인(聖人)은 ‘주역’에서 코끼리 ‘상(象)’이라는 글자를 ‘음과 양이 사상(四象: 네 가지 자연현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는 문구에 사용했다. 이는 모름지기 코끼리 형상을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깊이 연구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열하에 도착하다
나흘 밤낮을 거의 눈을 붙이지 못한 하인들은 길을 가며 서서 졸았다. 진기한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렸던 연암도 어두워지자 비몽사몽 중에 말 타고 이동했다. 하둔이라는 고을에서 마부 창대가 인사불성이 되었다. 연암은 창대의 몸을 흰 담요로 둘러싸고 말 위에 띠로 묶었다. 그리고 다른 마부에게 부탁해 먼저 보내니 벌써 밤이 깊었다.
9월 7일 닭이 울자 연암은 사절단보다 먼저 출발해 난하라는 강에 이르렀다. 조그만 배가 네 척밖에 없었으나 다행히 청나라 관리의 특별 배려로 어렵잖게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너 2.5㎞쯤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쌍탑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윗돌 봉우리 두 개가 마치 탑처럼 마주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날 오전 10시, 연암은 드디어 열하에 들어섰다. 궁궐이 웅장하고, 거리 좌우에는 점포들이 2.5㎞나 뻗쳐 있다. 연암의 눈에 1713년에 쌓았다는 열하성은 지나오면서 본 여러 고을의 성곽들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조선사절단 일행은 1779년 새로 지어진 태학(太學)으로 갔다. 그곳은 대학교육기관이며 학제는 연경의 그것과 같았다. 대성전·명륜관 등 본관과 부속건물 모두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암은 숙소로 사용할 태학의 부속건물을 사절단 요리사가 조리하는 중에 장작불 연기로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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