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한족의 ‘이이제이’ 책략, 마땅히 경계해야 할지니…

입력 2016. 08. 1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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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중국의 주변국 분열정책


고구려에 패해 귀순한 말갈 돌지계

당 태종, 李 씨 성 하사하며 대접

 

순주에 관한 수백 년 역사 언급

수·당이 돌궐·말갈족 이용해 고구려 공격 멸망시킨 점 상기

 

 

티베트 사신을 맞는 당 태종.  북경고궁박물관 소장

 





한족의 책략을 되새기다

1780년 9월 3일 아침, 일행의 대부분을 연경에 남겨둔 채 열하로 향한 조선사절단은 길을 잘못 들어 10㎞쯤 돌아가고, 빗물로 생긴 웅덩이들을 헤쳐나가느라 갖은 고생을 하며, 밤늦게 손가장(孫家莊)이라는 고을에 도착했다.

잠시 눈을 붙인 연암은 9월 4일 동틀 무렵 출발해서 한참 가다 보니, ‘순의현 경계’라고 쓰인 정자 모양의 경비초소가 나타났다. 20㎞쯤 더 이동하니 ‘회유현 경계’라고 적힌 초소도 보였다. 연암은 순의현과 회유현을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순주(順州)라는 군사요지로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6세기 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말갈족이 패배하자, 그 우두머리 중 하나인 돌지계가 부여성에 살던 여덟 부락의 주민을 인솔하여 수나라로 왔는데, 그곳이 순주다. 한편, 7세기 초 당나라 태종은 돌궐족의 돌리가한을 오류성(현재 랴오닝성 차오양시)의 우위대장군에 임명하고, 오류성의 관할지역인 순주의 주민을 다스리는 도독으로 삼았다.”

연암은 581년 한족(漢族)이 중국을 통일하고 수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가 그 뒤를 잇다가 907년에 멸망하고, 혼란의 시기를 겪은 후 960년 송나라가 건립되기까지의 순주에 관한 역사를 소개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주변 민족을 분열시켰던 한족의 책략을 상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하다.



말갈과 돌궐, 고구려

말갈족은 기원전 6~5세기부터 중국 동북부 지역에 살면서 시대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이라고 불렸던 종족이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말갈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수나라 역사책 ‘수서’에는 수십 개의 부족 중 강력한 7개의 말갈 부족이 언급돼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강해지자 흑수부(黑水部)를 제외한 나머지 6개 부족은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고 한다.

연암의 돌지계에 관한 언급은 말갈족 궐계부의 우두머리 돌지계가 8개 부족의 우수한 병사 수천 명을 인솔하여 수나라로 왔다는 송나라 지리책 ‘태평환우기’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궐계부는 ‘수서’에 기록된 강한 부족에 포함되지 않지만, 당 태종은 돌지계를 후하게 대접했으며, 이(李) 씨라는 성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돌지계의 아들 이근행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순주 북쪽의 영주 도독을 지낸 그는 고구려 공격,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저항 진압, 당나라와 신라의 전쟁 때 신라 공격에 참가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 사망 후,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맏아들 연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해 고구려 공격에 앞장섰다.

참고로 말갈(여진)족은 12세기에 금나라를 세워 중국 북부를 차지했으며, 17세기에는 청나라를 세우고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꾼 뒤 중국 영토를 거의 오늘의 수준으로 팽창시킨 종족이기도 하다.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에서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뻗쳤던 튀르크계 민족이다. 특히 수나라, 당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로 강대한 제국을 형성했었다. 그러나 수나라의 교묘한 이간책으로 583년 돌궐족이 서(西)돌궐과 동(東)돌궐로 분리되었고, 당나라 때에는 연암의 언급처럼 동돌궐의 돌리가한이 당 태종에게 망명해 왔으며, 고구려 공격에도 참여했다.



청나라 황제 근위대(18세기 말 영국 화가의 그림).  
 필자 제공

 

 



서곡을 바라보며

9월 4일 연암은 순의·회유 현을 지나 백하(白河)에 이르러,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온 이슬람 국가의 태자를 보았다. 그리고 배편으로 백하를 건넌 다음, 밀운성이라는 고을을 지나서 3㎞쯤 갔을 때다. 나귀를 타고 오는 청나라 사람이 2㎞쯤 앞의 시냇물이 사람의 이마에 닿을 정도로 크게 불어나 못 건너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알려준다.

통역관이 직접 가서 사실이란 것을 확인한 후, 사절단은 일단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모두 말에서 내렸으나, 비가 내리고 땅이 질어서 쉴 곳이 없다. 다행히 곧 비가 멎어서 인근의 조그만 별궁으로 들어갔다. 연암은 오던 길에 밀운성 근처에서 별궁을 보았는데, 2㎞도 못 되는 이곳에 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나, 자세히 살필 경황이 없었다.

얼마 후 해가 홍라산으로 넘어가고, 서곡(黍谷)·조왕 등 초록빛 산골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연암은 어릴 적 과거시험 준비를 할 때 배웠던 ‘서곡에서 피리를 불다’라는 구절을 회상했다. 기원전 3세기, 음양사상가 추연이 추위로 곡식이 못 자라던 산골에 피리로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기장[黍]이란 곡식을 자라게 해서, 서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옛일을 말이다!

시냇물이 줄지 않으므로 사절단은 밀운성으로 되돌아가는데, 길에도 물이 차서 말의 배까지 닿는다. 성문에서 말을 세우고 들어가니, 밀운성의 장관이 용케도 미리 연락을 받고 직접 나와서 환영한다. 밤을 새울 곳을 민가로 정하고, 고을의 관리였던 소 씨의 집에 들어갔다.

집은 별궁이나 다름없었는데, 주인은 벌써 죽었고, 젊은 아들이 엉겁결에 사절단을 맞았다. 사절단 대표가 청심환 한 개를 주니,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했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잠자던 중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곧 밀운성 장관이 10여 명의 인부 편에 음식물과 술, 땔감과 말먹이 등을 보내왔다. 그러나 사절단 대표는 황제의 명령 없이 물건을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낸다.



건륭제의 특별 명령

잠시 후, 건륭제가 보낸 군기대신 복차산(福次山)이 찾아왔다. 황제로부터 조선사절단을 만나서 구두로 직접 전달하라는 특명을 받고 밀운성으로 찾아온 것이다. 복차산은 직급이 높지 않고, 나이가 스물대여섯밖에 안 돼 보였지만, 황제를 곁에서 모시기 때문에 ‘대신’이라고 높여 부른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복차산이 사절단을 만나러 연경까지 갔으나, 서로 길이 엇갈려서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뒤쫓아 왔다는 것이다. 더욱 겁나는 사실은 그가 오자마자 급히 말 타고 떠나기 전에 두세 번 반복한 황제의 명령이었다.

“9월 7일 아침까지 반드시 열하에 도착하라!”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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