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천하에 가장 괴로운 슬픔은?
조선사절단 중 207명은 연경에 남기고
74명만 황제축하연 위해 열하로 떠나며
자주권 상실한 국민의 슬픔 절절히 표현
피서지 혹은 전략적 거점?
“열하는 중국 황제의 별궁이 있는 곳이다. 연경에서 동북쪽으로 168㎞, 만리장성 밖으로 80㎞ 거리에 있다. 본래 이름은 승덕(承德)인데, 청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뜨거운 강이라는 뜻의 열하(熱河)로 이름이 바뀌었다. 강희제(1654~1722) 때부터 별궁의 이름을 ‘피서 산장’이라고 부르고, 피서지로 삼았다.”
열하일기에는 위와 같은 소개와 함께 강희제 이후 해마다 여름이면 황제와 아들, 사위, 고위 관리들이 닷새마다 한 번씩 이곳에서 나랏일을 논의한다고 기록돼 있다. 나아가 연암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청나라 관리가 연경에서의 거리가 168㎞라고 하는데, 이는 네댓새 만에 이동해야 하는 조선사절단을 안심시키기 위한 술수이며, 실제는 280㎞쯤 될 것으로 보았다.
둘째, 열하는 피서지라기보다는 북쪽의 오랑캐, 특히 몽골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성(城)과 그 주위에 파놓은 연못과 궁전이 날로 늘어나고, 다른 별궁들보다 화려하고 장엄하며, 연경보다 경치가 좋아서 황제가 해마다 이곳에서 머문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히 건륭제가 1780년 봄에 중국 남부지역을 시찰한 후 연경에 들르지 않고 바로 열하로 가서 9월 11일 70세 생일잔치를 맞이하는 것에 주목했다. 가을의 생일 행사를 피서지에서 치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았다.
“열하는 더는 적을 견제하고 방어하는 곳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주색에 빠져서 흥청망청 노는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연암은 청나라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결코 맹목적인 배움이 아니었다. 연경의 유리창을 구경한 홍대용이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했듯이, 연암도 쾌락에 젖은 황실을 목격하고 청나라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비록 청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민족이 몽골족이라고 잘못 판단하기는 했지만!
열하로 출발하다
1780년 7월 25일 압록강을 건넌 조선사절단은 건륭제의 생일인 9월 11일 이전에 연경에 도착하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썼다. 또한, 연경에서 열하로 가게 되지 않을까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간 사절단이 단 한 번도 그곳에 간 적이 없으며, 길이 험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다행히 8월 30일 연경에 도착했고, 연경에서 축하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9월 3일 새벽, 열하로 오라는 건륭제의 명령을 전달받았다. 더구나 건륭제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 조선사절단이 열하로 오지 않고 연경에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청나라 관련 책임자들에게 감봉(減俸) 처분을 내렸다는 뉴스였다.
청나라 관리들의 잘못이었지만, 사절단 일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안내를 맡은 청나라 통역관들은 난리가 났다. 어떤 이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고, 어떤 이는 자기 뺨을 때리며, 어떤 이는 손으로 자기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이제 죽게 생겼다고 통곡했다.
이런 혼란 속에 사절단 대표는 열하로 떠날 인원 74명을 선발하고, 아직 기운이 남아있는 말 55필도 골랐다. 이는 사절단 규모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연암은 누적된 피로와 열하에서 바로 귀국하면 연경 구경을 못 하므로 망설였으나,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 함께 가자는 대표의 제안에 따랐다. 이는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한 기행문학인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연경에서 겨우 네 밤을 지낸 조선사절단은 몇 시간 내에 채비를 마치고 9월 3일 오전 10시에 열하로 출발했다. 그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207명의 사절단 일행은 연경에 남겨두고! 연암은 이때 자주권을 상실한 국민이 겪는 이별의 슬픔을 ‘열하일기’에 남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탁월한 ‘이별론’으로 평가받아 마땅한 이 글을 줄여서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이별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생이별을…
“인간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이별이고, 이별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생이별(生離別)이 아닐까?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는 이별은 괴롭다고 할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사람마다 겪는 일이고, 느끼는 감정도 같은 천하의 순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의 이치를 따를 줄 아는 인간이라면, 죽고 사는 괴로움은 크지 않을 것이다.
진짜 더할 나위 없는 괴로움은 하나는 가고 하나는 남게 되는 이별에서 비롯된다. 그런 이별은 장소와 때에 따라 괴로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별의 괴로움에 어울리는 곳으로는 물이 제격이다. 강이든 바다든 개천이든 크기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물이 그것이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별하는 자들의 배경으로는 물이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협소해서 생이별의 괴로움이 별로 없지만, 뱃길로 중국에 들어갈 때는 최고로 괴로운 감정을 느꼈다.
우리말로 배가 떠난다는 뜻을 지닌 ‘배따라기’라는 곡이 있는데, 곡조가 간장을 끊는 듯이 구슬프다. “닻 감아라, 배 떠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서”라는 가사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물겨운 노래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하인 장복이와 강이나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헤어지는데 왜 이리 괴로움이 클까? 그것은 남의 나라에서 생이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슬프다! 1637년 우리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맏아들 소현세자(1612~1645)가 심양에 인질로 잡혀 와서 신하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때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통곡할 시기가 아니었을까?
아, 애통하다! 사람을 괴롭히는 이(蝨: 슬)나 그 새끼인 서캐처럼 미천한 존재인 내가 백여 년 전의 옛일을 오늘 생각해봐도 넋이 나가고, 뼈가 저리다 못해 부러질 것 같구나. 그러니 당시 이별할 때는 어떠했을까? 더구나 그때는 청나라 관리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었으니, 이별의 아픔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참았을 것 아닌가?”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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