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오랑캐 출신 임금도 ‘유정유일’ 정신 계승 했노라”

입력 2016. 07. 2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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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자손에게 복을 주는 정치


“중국 21대 왕조 3000년 동안 천하는 어떻게 다스려졌나”

 

공자는 ‘나라 다스리는 방법’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 했으나 실천하지는 못했고

오랑캐 임금, 성인보다 학문은 뒤지지만

실천함으로써 유정유일의 정신 보여

 


 



청나라 수도 연경에 도착

1780년 8월 30일 조선사절단 일행은 애초 목적지인 연경에 도착했다. 7월 25일 압록강을 건넌 후 36일 만에, 6월 27일 한양에서 출발한 지 64일 만이다. 열하일기에는 압록강을 건너서 연경까지의 거리가 812㎞라고 기록됐으나, 한양으로부터는 1244㎞나 된다.

최근 중국이 홍수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듯이, 사절단이 청나라에 갔을 때도 큰 물난리가 났던 것 같다. 8월 30일 새벽 연암 박지원은 통주(通州·현재 베이징시의 일부)의 외곽을 흐르는 노하(潞河)에 이르렀다. 열흘 전에 강이 범람해 인근의 수만 호 집들이 물에 쓸려가고, 인명피해도 수없이 많았던 곳이다.

구호용 곡식 300만 석을 수송해 온 선박들로 붐비고 있는 노하를 보고 연암은 만리장성과 비길 만한 장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배에 올라타서 그 구조와 곡식을 싣는 방법을 세심하게 살폈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배 전체에 특별한 기름칠이 돼 있다는 사실, 심지어 깃발을 보고 어느 곳에서 온 선박인지까지도 확인했다.

통주는 당시 대운하의 북쪽 종착지이자 천하의 물자가 모두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연경까지 16㎞의 길바닥엔 돌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조선의 공식 사절 3인은 연경의 조양문(朝陽門)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었다. 동악묘(東嶽廟)에 가서 관복을 정식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중국의 5대 명산 중 하나인 동악은 중원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동쪽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태산(泰山)이라고도 불린다.

동악묘는 옥황상제를 대신해 인간의 생명과 혼령을 관리한다는 동악 대제를 주인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다.

동악 대제를 주인 신으로 모시는 사당 동악묘.  필자 제공

 


“동악묘 건물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여태까지 보던 중 처음이다. 성경(현재 선양)의 궁궐도 이와는 비교가 안 된다. 14세기 초 원나라 때 세워졌는데, 15세기 중반 명나라 때 증축됐다. 17세기 말 청나라 때 불탔으나 몇 년 만에 복구되고 강희제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정문에는 청색 유리벽돌과 초록 유리벽돌로 쌓은 두 개의 패루가 서 있는데 돌로 된 것들보다 훨씬 휘황찬란하다.

뜰에 서 있는 100여 개 비석의 글씨는 원나라 명필 조맹부가 쓴 것이 많고, 그 아우들 글씨도 있다. 동·서쪽의 첫째 줄 비석에는 비각을 짓고 누런 기와로 덮었다. 비각의 누대에 각각 종과 북을 설치했는데, 동쪽 것은 ‘별음(鼈音·자라 소리)’, 서쪽 것은 ‘경음(鯨音·고래 소리)’이라고 부른다.”

연암은 동악묘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때 세워져서,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거쳐, 만주족의 청나라 때까지 이르렀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잠시 후에 펼쳐질 정치사상 교육의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동악묘에서 의관을 정비한 공식 사절 3인은 외교문서를 전달하러 조양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연암은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으로 갔다. 조선사절단은 17세기 중반 옥하강 서쪽 기슭에 지어진 이 객사를 주로 사용했으나, 18세기 초부터는 러시아 사절단이 차지해 회동관에서 묵었다. 그런데 1779년 회동관이 불타서 연암 일행은 다시 옥하관에 머물렀다.



연경 도착 성명 1425자 글 지어

8월 30일 밤, 연암은 옥하관에서 1425자의 글을 완성했다. 7월 25일 압록강을 건너는 배 안에서 경계인(境界人)의 삶을 주제로 행한 그의 짤막한 강연(본 연재물 제8회 참조)이 서론이었다면 이 글은 본론이었다. 또한, 그것은 연암의 연경 도착 성명이자 소리 없는 절규였다.

연암의 절규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애석하게도 글자 탄생 전에는 나라의 존망에 관한 연대나 도읍지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문자가 생긴 후 중국 21대 왕조의 3000년 동안 천하는 어떤 기술로 다스려졌을까?”

연암은 그 답을 ‘유정유일(惟精惟一)’로 보았다. 그것은 ‘서경(書經)’에 등장하며, 1) 사람의 마음은 탐욕이 커져만 가고 2) 하늘이 내린 착한 심성은 희미해져만 가니 3) 마음을 맑게 하고 하나로 모아서 4) 진심으로 중용을 지키라는 구절 중에서 3)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암은 3)과 4)는 물론, 자손만대가 복을 누리게 하는 마음가짐도 포함된 것으로 해석했다.



聖人과 어리석은 자의 정치 철학 설파

“나는 유정유일의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 요·순임금, 치수사업을 한 하나라 우임금, 토지제도를 마련한 주나라 문왕의 아들, 학문을 발전시킨 공자, 재정·세금제도를 개혁한 관중을 알고 있다. 또한, 문자 탄생 전에도 많은 성인이 그런 마음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이는 자기 이익을 위함이었을까, 자손만대와 함께 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었을까?”

연암은 성인들과 달리 어리석은 자들은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해악을 끼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음흉한 생각과 행동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데는 성인을 능가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이를 환영하고, 겉으로는 배척하면서도 암암리에 받아들이며, 공개적으로 욕하면서도 이익을 누린다는 것이다.

“보라! 하나라 걸왕, 은나라 주왕은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미지 않았던가? 몽염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만리장성을 쌓지 않았는가? 진시황은 천하에 곧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상앙은 불에 탄 재를 길에 버려도 칼로 이마에 죄명(罪名)을 새기는 끔찍한 법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들은 역사에 어리석은 자로 남았으나, 후대인이 그 공로와 이익을 누리니, 그들로서는 슬프지 않겠는가?”

연암은 말한다.

“나는 조양문 안으로 들어와서 요·순임금, 하나라 우임금, 주나라 문왕의 아들, 공자, 관중과 같은 성인이 이룬 행적에서 유정유일의 마음씨를 보았다. 또한, 걸왕, 주왕, 몽염, 진시황, 상앙과 같은 어리석은 자들이 이룬 행적에서도 유정유일의 정신을 느꼈다.

공자는 나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럴듯한 대답을 했지만, 몸소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늘의 뜻으로 왕위에 오른 오랑캐 임금은 성인보다 학문은 뒤지지만 이를 실천했다. 이로써 나는 중화의 민족만이 아니라 오랑캐 출신 임금도 유정유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을 알았노라.”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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