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사호석과 호질
이름만 있고 보잘것없는 ‘사호석’
옛 중화 명분만 좇는 지식인 비판
상점서 호랑이가 주인공인 글 발견
베껴 쓰고 내용 다듬어 ‘호질’ 제목
표리부동하고 무능한 주류층 고발
사호석 방문기
열하일기에는 1780년 8월 25일 연암이 영평부에서 남쪽으로 2.5㎞쯤 떨어진 곳의 사호석(射虎石)을 구경한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의 장군이 호랑이인 줄 알고 화살을 날렸는데, 호랑이 모양의 돌에 박혔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바위다.
“가파른 언덕 위에 바위 하나가 드러났는데, 비스듬히 바라보니 흰색이다. 바위 아래의 비석에는 ‘한비 장군이 호랑이를 쏜 곳’ ‘건륭 45년 가을 7월 26일 조선인 아무개가 구경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건륭 45년 7월 26일은 양력으로 1780년 8월 25일이며, 연암이 방문했던 날이다. 과연 비석에 연암이 방문한 날짜와 ‘조선인 아무개가 구경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을까? 이 의문은 잠시 후 풀기로 하고, 우선 본명이 이광(李廣)인 한비(漢飛: 한나라의 날아다니는) 장군에 대해 알아보자.
이광은 기원전 2세기에 흉노족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사마천의 ‘사기’에 인물평이 실린 유명인사다. 청년 시절 사마천은 이광의 지휘역량을 보고 감동했으며, 중년이 되어서는 이광의 손자인 이릉(李陵) 장군을 옹호하다가 생식기가 제거되는 궁형을 당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는 만주족에 대한 복수심이 팽배했다. 그 때문에 조선사절단은 먼 옛날 흉노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이광의 유적인 사호석을 즐겨 찾았다. 실제 가보면 별 볼 일 없는 곳인데도 말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1766년 2월 1일, 35세의 홍대용과 43세의 이진형(李鎭衡)의 방문이다.
이진형은 당시 세자(정조)의 스승이었으며, 정조가 국왕이 된 후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홍대용의 ‘연기(燕記)’에는 1월 31일 온갖 수소문 끝에 사호석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튿날 방문했던 사실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실물을 보고 실망한 홍대용은 이진형에게 말했다.
“눈 오는 날, 추위를 무릅쓰고 낡고 하찮은 돌 하나를 보고 돌아가니 틀림없이 일행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진형은 정색하고 자신의 감회를 피력한다.
“내게는 이곳 시찰이 이번 청나라 방문 중 으뜸가는 구경거리일세. 이광 장군이 취중에 호랑이를 개 보듯 여기고 활을 당겼던 일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 빼어난 기상에 감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 돌을 보니 내 기분이 마치 산처럼 용솟음친다네. 열 말 술이 없어서 마음속의 울분을 모두 씻어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네그려!”
‘호질’의 탄생
이진형의 격정적인 감회는 당시 조선 주류층 사대부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며, 청나라의 발전상을 강병부국(强兵富國)의 모델로 보았던 홍대용·박지원 등 비주류 선비들의 냉철한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런 차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문학의 금자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열하일기의 사호석 방문 기록은 너무 짧고, 거의 홍대용의 ‘연기’를 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차이가 있다면, 비석이 ‘강희 16년(1677년)에 세워졌다’는 ‘연기’의 내용이 열하일기에는 ‘건륭 45년 7월 26일(1780년 8월 25일) 조선인 아무개가 구경하다’라는 문구로 바뀐 것이다. 이는 연암이 사호석을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케 한다.
연암은 왜 사호석 방문기에 자신의 방문 사실이 비석에 새겨진 것처럼 기술했을까? 이는 이틀 후 등장하는 ‘호질’(虎叱: 호랑이의 꾸지람)이라는 작품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위대한 문장가 연암의 복선(伏線)이라고 할 수 있다.
8월 27일 연암은 옥전현의 상점에 들렀다가 호랑이가 주인공인 글을 목격한다. 벽에 가로로 길게 걸린 족자에 쓰인 총 1935자의 한문이었다. 대충 훑어본 그는 앞부분은 자신이 베끼고, 뒷부분은 함께 간 정 진사에게 부탁했다. 저자도, 제목도 없던 글이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문 단편소설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학식이 모자란 정 진사는 덜렁대고 눈까지 어두워서 수많은 글귀를 빼먹거나 틀리게 적었다. 그 때문에 연암은 나눠서 베낀 두 부분의 문맥을 잇고, 내용을 다듬었으며, 원문에 없던 ‘호질’이라는 제목도 붙였다. 나아가 작품이 걸렸던 상점 주인의 이름(심유붕), ‘호질’ 전문(全文), 심지어 자신의 작품평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호질’이 주는 교훈
연암은 말한다.
“이 글은 비분강개한 중화인(中華人)이 근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치에 어긋나는 내용이 많고, 장자(莊子)의 ‘거협’이나 ‘도척’ 편처럼 풍자를 통해 유학자들을 비난하는 글이다.
인간적 관점으로는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있지만, 하늘의 뜻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명나라는 국운이 다했고 중국 선비들이 변발한 지 100년이 넘었건만, 자나 깨나 가슴을 치며 옛 명나라 황실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 무슨 일인가? 또한, 청나라는 옛 오랑캐 왕들이 중국을 본받았다가 쇠망했던 사실을 철비(鐵碑: 쇠로 만든 비석)에 새겨서 만주식 황실 교육기관에서 가르치고, 자기네 전통 옷과 모자를 강요하는데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글의 내용에 나오는 ‘호질’을 제목으로 삼고, 저 중원에 깨끗하고 태평한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노라!”
열하일기에는 ‘호질’ 외에 ‘허생전’이라는 단편도 수록됐다. 연암집에 실린 ‘양반전’ 등 8편을 포함하면 연암은 총 10편의 한문 단편소설을 남겼다. 그중에서 ‘호질’은 단연 으뜸이며 내용도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현대인에게도 본보기가 될 호랑이의 꾸짖음 한 구절만 소개하기로 한다.
“선비들은 부드러운 털을 아교로 붙여 끝이 대추 씨처럼 뾰족하고 한 치도 안 되는 붓을 만든다. 이를 오징어 먹물에 담갔다가 가로세로로 치고 찌르면, 굽은 획은 갈고리 창 같고, 날카로운 획은 칼끝 같으며, 예리한 획은 칼날 같다. 또한, 갈라진 획은 삼지창 같고, 반듯한 획은 화살 같으며, 둥근 획은 활과 같다. 이런 무기들이 한 번 움직이면 온갖 귀신이 통곡할 정도이니, 서로 잡아먹는 데는 선비보다 잔혹한 놈이 누가 있겠느냐?”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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