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모양은 흉내낼 수 있으나 정신은 모방할 수 없나니…”

입력 2016. 07. 1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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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중국인 집에 들렀다가 윤순 글씨 보고

“조선 사람들은 새겨진 글자 보고 연습

붓과 먹의 오묘한 감정 표현 떨어져

조선의 종이·붓도 중국 것보다 못해”

 

위작으로 보이는 조선화가 화첩에는

그림 창작연대·서명 없음 안타까워해

 


 


장택단의 ‘청명상하도’의 일부.
 베이징 고궁박물관 소장


관내정사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인 산해관에서 청나라 수도 연경까지는 256㎞다. 연암 박지원은 1780년 8월 22일 산해관을 통과해서 강을 건넌 후, 홍화포라는 고을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열하일기에는 ‘관내정사(關內程史·산해관 안쪽의 여행기록)’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는데, 이는 8월 23일 홍화포를 출발해서 9월 2일 연경에 도착하기까지 10박11일 동안의 기록이다.

8월 23일 연암은 범가장에서 점심을 먹고, 유관에서 숙박했다. 이날 27㎞를 이동하면서 그는 청나라인의 유비무환의 자세를 실감했다. 즉, 망을 보고 봉화를 올릴 수 있는 돈대(墩臺)가 2~4㎞마다 설치돼 있는 것을 보았다. 조선의 다른 연행록에도 돈대가 자주 등장하지만, 연암처럼 세밀하게 관찰한 사람은 없다.

“돈대는 네모 반듯하며 높이는 9m쯤 된다. 위에는 3칸짜리 누대(樓臺)가 지어졌는데, 그 곁에 5m나 되는 깃대를 꽂는 막대가 세워졌다. 아래에도 5칸짜리 집이 있다. 돈대의 담장 위에는 활집·화살통·표창·화포 등 그림이 진열됐으며, 누대 앞에는 여러 종류의 칼과 창들이 죽 꽂혀 있다. 더욱이 누대의 벽에는 봉화 올리는 방법과 망보는 방법이 소상하게 기록된 문서가 붙어 있다.”



정선의 ‘대은암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과 중국 글씨의 차이

8월 24일 사절단 일행은 무령현에 도착하자 볼거리가 많은 중국인 서학년의 집을 찾았다. 그는 이미 사망하고 집에는 둘째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청나라 황실 인물들이 쓰고 그린 서화가 즐비했다. 특히 연암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조선의 명필 윤순(尹淳·1680~1741, 예조판서와 평안도 관찰사 역임)의 글씨였다.

윤순은 172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수준 높은 골동품 소장자인 서학년의 집을 방문해 서로 친분을 나눴다고 한다. 이후 서학년의 이름이 조선에 널리 알려졌고, 조선사절단은 연행 길에 관례로 그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암은 윤순의 글씨와 중국 명사들의 글씨들 사이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첫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글씨 연습을 하는 사람은 옛사람의 필적을 직접 보지 못하고 쇠나 돌에 새겨진 글자를 본보기로 할 뿐이다. 새겨진 글씨에서는 붓과 먹 사이에 원초적으로 간직된 오묘하고도 무한한 감정표현의 묘미를 배울 수는 없고, 단지 글씨 쓰는 법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글씨의 모습과 기운은 비슷하게 본뜰 수 있지만, 힘줄과 뼈대에서 보이는 것 같은 강하고 힘찬 정신을 모방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먹을 짙게 칠했을 때 획이 굵고 서툴게 보이며, 마르게 칠했을 때는 마른 등나무처럼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는 돌에 새겨진 것이나 쇠에 그려진 글씨를 보고 연습했기 때문이다.”

둘째 차이점은 조선의 종이와 붓이 중국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게 연암의 생각이다.

우선 그는 옛날부터 중국에서 우리나라 백추지(한지를 다듬질해서 만든 종이)와 낭모필을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외국 물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종이는 애초에 다듬지 않으면 결이 거칠어서 쓰기 힘들고, 다듬이질을 지나치게 하면 지면이 너무 빳빳하고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먹이 스미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붓도 뻣뻣하고 날카로운 우리나라 붓보다 중국처럼 마치 효자가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듯이 종이에 쓸 때 부드럽고 부서지지 않는 양털로 만든 것이 낫다고 지적한다.


심사정의 ‘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품과 위작

8월 24일 오후 영평부에 도착한 연암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떤 점포에 들렀더니 마침 등불을 켜고 조선사절단의 모습을 나무판에 새기고 있었는데 아주 조잡했다. 오던 길에도 도로변 가옥의 벽에 새겨진 유사한 그림들을 보았으나, 실제로 제작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점포의 주인은 판화 제작으로 유명한 도시인 소주 출신의 호응권이었다. 그는 여러 작가의 그림들을 모은 화첩을 들고 나왔다. 형편없이 해진 표지에 흘림체 글씨가 난삽하게 쓰여서 가치가 없어 보였으나 그는 보물처럼 아꼈다. 그날 오후 늦게 점포에 찾아온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조선사절단 일행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란다.

순은(純銀) 3.5냥을 주고 샀는데, 표지를 바꾸면 9냥은 거뜬히 받을 수 있다는 자랑도 한다. 다만, 작가의 이름이나 호를 제대로 알고 싶으니, 일일이 확인해 주도록 부탁하면서 술과 과일을 대접한다. 연암은 평소 우리 서화에 연대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으므로 힘닿는 대로 작가 이름을 적어주었다.

화첩에는 김정, 이경윤, 김명국, 윤두서, 정선, 심사정, 강세황 등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17명의 작품이 등장한다. 특히 ‘대은암도’ ‘산수도’(4폭)와 ‘사계절 정경’(8폭) 등 정선의 그림이 네 종류나 된다.

그런데 과연 사절단 일행이 이런 보물을 쌀 세 가마 반 값에 해당하는 순은과 교환했을까? 연암은 이 화첩의 그림을 진품이라고 생각했을까? 또한, 요즘 우리 미술계를 흔드는 위작 논란에 대해 연암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독자 여러분은 이런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홍대용이 소장했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연암이 써넣은 아래의 구절을 보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글씨는 왜 하필 왕희지·안진경·유공권이라야 하며, 그림은 어째서 고개지·육탐미·염입본이라야 하는가? 진품만 찾기 때문에 위작이 수백 가지가 나오며, 비슷할수록 가짜가 많은 것이다. 중국의 융복사나 옥하교에 가면 직접 글씨나 그림을 그려서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고상한지 속된지를 스스로 가려서 사면 좋다.”

참고로 ‘청명상하도’는 원래 북송의 화가 장택단(張擇端·1085~1145)의 걸작인데, 이를 모사하거나 같은 제목의 그림이 18세기에 중국과 조선에 널리 유행했었다. 홍대용이 소장했던 그림도 장택단이 그린 것은 아니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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