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국민 의식 개혁을 말하다
의주 관노비들의 악행 때문에
이곳에선 조선인을 원수 대하듯 해
한겨울만 쓰는 양털모자 수입 위해
귀한 은 낭비하는 모습에 한숨만
장대 올라 벌벌 떠는 시찰자들 보며
높이 올라가려고만 하는 관리 비판
불량한 자들의 매국 행위를 경계하라
연암 박지원은 1780년 8월 17일부터 22일까지 명나라와 청나라의 격전지를 둘러보며, 군의 유비무환 자세 외에도 또 다른 세 가지를 경계했다.
첫째는 악랄한 천민에 대한 경계다.
이는 조선사절단의 공금 분실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8월 17일 밤, 연암은 4년 전 조선사절단이 공금 천 냥을 도둑맞았던 고교보라는 고을에서 묵었다. 사건을 보고받은 청나라 황제는 돈을 물어주고 범인 체포를 지시했으며, 조사 과정에서 무고한 청나라 사람 4~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그곳 사람들은 조선인을 원수처럼 여겼는데, 연암도 이를 실감했다.
연암은 당시 청나라 조정이 조선사절단을 특별히 예우했다고 지적하고, 실제 범인은 중국인이 아니라 의주의 관노비인 마부일 것으로 의심했다. 연경에 드나드는 것을 생계로 삼는 그들은 100여 명씩 몰려다니면서 불량한 짓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의주 관청에서 그들에게 여행경비로 한지(韓紙)만을 주는 형편이니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조선에서 천하의 매국노로 악명이 높았던 정명수를 의식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고로 원래 평안도 은산의 관노비였던 정명수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통역으로 조선에 온 이후 악행을 일삼았다.
“남루한 옷을 입고 씻지도 않는 그들은 도둑질을 당연시하고, 심지어 사람을 살해할 정도로 흉악하다. 그러니 4년 전의 도난 사건이 어찌 이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돈의 분실은 사소한 일이지만, 만약 병자호란 같은 난리가 다시 일어난다면, 평안도 용천과 철산의 서쪽은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니, 변방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조선 부자들의 낭비벽을 경계하라
둘째는 권세 있고 돈 있는 자들의 낭비벽에 대한 경계다.
8월 21일 연암은 양털 모자 생산지로 유명한 전둔위라는 고을에서 숙박했다. 그곳에 모자 공장이 셋 있는데, 한 곳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100명이 넘고, 모두가 웃통을 벗고 바람처럼 빠르게 모자를 만들고 있었다.
통상 의주 상인들은 중국으로 들어갈 때 공장으로 몰려가서 모자를 예약해 놓았다가 돌아올 때 싣고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 공장 주인들은 각기 단골손님을 정해서 술과 음식을 거나하게 대접했다. 연암은 말한다.
“모자 만드는 법이 아주 쉬워서 나도 양털만 있다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기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수백만 명이 넘는 우리 국민은 양고기 맛을 모르고, 매년 겨울을 나기 위해서 털모자 하나씩을 사야 하니 돈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해마다 사절단이 갈 때 지참하는 은이 10만 냥은 될 테니, 10년이면 무려 100만 냥이나 되지 않겠는가?
모자는 겨울철 석 달만 쓰다가 봄이 되어 낡고 해지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천 년이 가도 망가지지 않는 은을 주고 한겨울이 지나면 폐기처분을 하는 모자와 바꾼다니! 은은 산에서 캐내는 데 한계가 있는데,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땅에다 갖다 버리니, 이 얼마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인가?”
당시의 모자 수입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1758년 조선 정부는 각 지방관청에 비축된 은화 4만 냥을 사절단으로 가는 통역에게 빌려줬는데, 외교 경비로 사용하고 남으면 중국산 방한용 모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관모제(官帽制)다.
그런데 이 제도는 정부가 무역에 직접 나서서 이윤을 남긴다는 비판과 함께 은화 비축량이 부족하게 되자 1774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공적인 목적으로 쓰는 은을 마련하고, 외교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새로운 법이 1777년에 제정되었다. 즉, 일반 상인이 그들의 돈으로 직접 모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판매하도록 한 것이다. 이 법을 세모법(稅帽法)이라고 부른다.
연암은 세모법이 시행된 지 3년 후에 중국에 가서 모자 무역 실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모자의 주된 수요층이었던 조선의 사대부와 부자들의 낭비벽과 새로운 법의 문제점을 함께 지적한 것이다.
벼슬아치의 출세욕을 경계하라
셋째는 벼슬아치의 출세욕에 대한 경계다.
8월 22일 연암은 장대(將臺)를 시찰했다. 장대란 장군이 멀리 넓게 보고 지휘할 수 있도록 성이나 요새 위에 높게 쌓은 곳이며, 그가 보았던 장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장대는 산해관 밖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연암은 기록했다. 높이는 18m쯤 되고, 둘레는 수백 걸음이며, 장대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담으로 낮게 덧쌓았다고도 소개했다. 담 아래로는 큰 구멍이 뚫려서 수십 명이 숨고, 무기를 보관할 수 있으며, 장성으로도 통했다고 한다.
“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이 얼마나 큰지 모를 것이고,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산해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가 높고 위엄이 있음을 알기 힘들 것이다.”
연암은 일행과 함께 장대에 올라가서 한참 동안 사방을 구경했다. 그러다 내려가려고 하니 감히 먼저 가려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벽돌로 쌓은 층계가 높고 험해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하인들이 부축하려고 하지만 몸을 돌릴 공간조차 없었다.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모두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연암은 오를 때는 앞만 보고 층계를 하나하나 밟고 오르므로 위험한 줄 모르지만, 내려오려고 밑을 바라보면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는데, 이는 높은 곳만을 추구하는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벼슬살이도 마찬가지다. 위로 올라갈 때는 남에게 한 계급, 반 등급이라도 뒤질세라 남을 밀어젖히고 앞자리를 다툰다. 그러다가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그때는 외롭고 위태로워 앞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아가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므로 다시 오르지도 내려오지도 못하는 법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관된 이치로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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