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깨진 기와 한 쪽·똥부스러기…담장·뜰 꾸미고 귀한 비료로 ‘또 하나의 문명’ 장관을 보다

입력 2016. 06. 0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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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랑캐에게라도 배워야



 

 

 

건륭제가 쓴 ‘의무려산’ 친필.

 

 

‘일신수필’이란?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아버지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에는 ‘열하일기’가 스물다섯 편으로 구성됐다고 적혀 있다. 그간 우리는 ‘도강록’(압록강을 건너 요양까지의 기록)과 ‘성경잡지’(십리하에서 소흑산까지의 기록)를 살펴보았다.

‘열하일기’에는 종종 기상천외한 용어가 등장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스물다섯 편 중 셋째인 ‘일신수필(馹신隨筆)’이란 소제목도 그중 하나다.

수필이란 경험이나 느낌을 자유롭게 서술한 글이다. 그런데 ‘일신(馹신)’이라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다. 국내 번역서에는 한결같이 ‘말을 타고 빠르게 지나가며 쓴 수필’이라고 풀이돼 있다. 역참에 소속된 말을 의미하는 ‘일(馹)’자와 원본의 ‘신’자를 ‘빠를 신(迅)’자로 임의로 바꿔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연암이 사용한 ‘신’자는 ‘물을 뿌리다’ 혹은 바닷물이 밀려든 ‘만조(滿潮)’를 일컫는다. 따라서 ‘일신수필’이 ‘수많은 말과 수레를 보고 쓴 수필’이라는 뜻은 아닐까? 이 편에 수레에 대한 예찬론이 등장하며, 고을마다 수레와 말이 길을 메우다시피 밀려드는 광경을 묘사한 구절도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신수필’ 편에는 미완성의 서문을 비롯해 1780년 8월 14일 새벽에 소흑산을 출발해서 22일 산해관에 도착하기까지 9일 동안의 기행문이 실려 있다. 특히 ‘북진묘 방문기’ ‘수레의 제도’ ‘산해관 견문기’ 등 아홉 종의 수필이 수록되었다.

이성량 패루.

진짜 멋진 청나라 구경거리는?

일신수필 서문은 소위 학문을 한다는 조선 선비의 고루한 생각을 안타까워하는 글로 시작된다. 즉, 다른 사람이 말한 것과 자기가 들은 것을 그대로 따르는 무리와는 학문을 논할 수 없는데, 하물며 평생 학문에 제대로 마음을 빼앗겨 보지도 않은 무리와 어떻게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들은 ‘태산(泰山)에 오르니 천하가 조그맣게 보인다’는 공자 말씀을 따르는 듯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한다. 또한, 석가여래가 온 세계를 살핀다는 말을 헛된 망상이라고 배척한다. 더구나 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갔다고 하면 괴상망측한 말이라고 꾸짖는다. 그러니 내가 본 천하의 멋진 구경거리를 누구와 얘기해야 하나?”

일신수필의 서문은 미완성의 글이다. 누군가 끝부분을 보충해 놓은 판본도 있으나 믿을 것이 못 된다. 오히려 서문에 바로 이어지는 8월 14일의 일기에서 불완전한 부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경에 다녀온 선비에게 가장 멋진 구경거리가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상급 선비는 볼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고 대답한다.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서 배울 게 없다는 것이다. 중급 선비는 비린내·누린내 나는 곳에서 볼 것이 무엇이겠냐며, 군사 10만 명만 있으면 모두 쓸어버린 후에 볼거리를 얘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함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진정 나라를 위하는 자는 국민과 나라에 이롭다면 오랑캐에게서라도 배워서 우선 국민을 잘살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경제적인 부강을 바탕으로 오랑캐의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이길 수 있는 튼튼한 국방력을 갖춘 다음에 오랑캐를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오랑캐는 옛 중국의 문물과 제도가 이롭고 보존할 만하다는 사실을 알고 본래 자기 것처럼 여긴다. 더구나 청나라에서는 세상 사람이 모두 버리는 기와와 조약돌을 담장이나 뜰을 꾸미는 데 유용하게 사용한다. 또한, 더러운 인분이나 말똥까지도 아껴서 비료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하급 선비인 내게는 깨진 기와 조각, 조약돌, 똥거름이 진짜 멋진 구경거리더라!”



의무려산과 이성량 패루

연암은 8월 14일 저녁 늦게 신광녕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에는 구광녕성(城)과 북진묘를 시찰했다. ‘열하일기’에는 성이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쪽에 있으며, 성 앞의 탁 트인 곳에 큰 강이 흐른다고 기록됐다. 또한, 성 주위에는 강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자(垓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만든 연못)가 있었다고 한다.

요동 벌판에 우뚝 솟은 의무려산은 높지 않으나, 중국 동북부 3대 명산의 하나이며, 우리 연행록에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심지어 홍대용은 이 산을 배경으로 조선의 고루한 선비와 서양 학문을 터득한 선비를 대비시켜 ‘의산문답’이라는 과학사상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바로 동양 최초로 지전설(地轉說)이 주창되었다는 책이다.

이런 관심은 의무려산이 우리 고대사와 맥이 닿아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홍대용은 이 산을 동이족과 한족이 만나는 곳으로 보았다. 또한,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도 우의정에까지 올랐던 허목(許穆)은 이 산의 주위가 고조선의 도읍지이자, 고구려의 졸본부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의무(醫巫)’란 병을 고치는 무당이며, ‘려(閭)’는 마을 어귀의 문 혹은 사는 곳을 의미하므로 의무려산은 병을 고치는 무당이 사는 마을의 산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이나 신단수가 의무려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날 연암은 구광녕성 북쪽의 패루(牌樓: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의 중국 특유의 건축물)를 보고도 감회에 젖었다. 그것이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인의 후예 이성량(李成梁·1526~1615)을 기리기 위한 패루이기 때문이다.

이성량은 요동 지역의 군사책임자로서 또한 경제실권자로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결국 명나라가 청나라에 패망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인물이다. 이는 1580년 여진족을 격퇴한 공로를 기려 명나라 황제의 지시로 세워진 이성량 패루가 청나라를 거쳐 오늘에까지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이성량의 장남인 이여송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 총사령관으로 4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도 참전했으므로 이성량은 두 아들을 조선의 전쟁터로 보냈다.

사진=필자 제공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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