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천재 문장가의 실수와 대처
가게 주인 글씨 써달라는 부탁에
여성 장식품가게에 국숫집 현판
뜻 잘못됐다는 것 나중에 깨닫고
글자 다시 써 위기 모면 칭찬받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같은 글
1780년 8월 11일 아침 일찍, 연암 박지원은 심양의 골동품 상점 두 곳에 들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실한 우정을 나눈 중국의 벗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우선 가상루에 들러 배관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이어 예속재로 가서 전사가로부터 골동품 목록과 연경의 상인 앞 편지 봉투 하나도 받았다. 연암을 추천하는 서찰이었다.
보슬비 오는 거리를 말 타고 가면서 연암은 이틀 밤이나 설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마부와 하인이 말 위의 그를 양쪽에서 부축했기에 가능했다. 코를 골며 단잠을 자다가 깨어났을 때, 하인이 낙타를 보았다고 귀띔한다. 연암은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워하며 생김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는 다음에 보면 꼭 깨우라고 당부한다. 이날 일행은 고가자까지 32㎞를 이동했다.
8월 12일 새벽, 연암은 전날 숙박했던 고가자를 떠나 33㎞의 강행군 끝에 저녁에 백기보에 도착했다. ‘열하일기’에는 이날 아침 요동 벌판의 모습이 마치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한 폭의 서양화처럼 절묘하게 묘사돼 있다.
“달이 지기 시작하자, 온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경쟁하듯 반짝거리고 마을 닭들이 번갈아 운다. 얼마 가지 않아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더니 너른 들판이 은백색의 수은(水銀)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다. 의주(義州) 상인들이 서로 얘기하며 지나가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어 마치 꿈속에서 환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수호지’나 ‘서유기’ 같은 기이한 책을 읽을 때처럼!
이윽고 하늘빛이 밝아 오니 그 많은 버드나무에서 매미가 일제히 울기 시작한다. 이 녀석들아! 너희가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낮 더위가 지독할 줄을 모를 줄 아느냐?
들판을 덮었던 안개가 점차 사라지자, 멀리 보이는 마을 사당 앞에 세워둔 깃발이 마치 돛대처럼 보인다. 뒤돌아 동쪽 하늘을 보니 불 같은 여름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수레바퀴처럼 붉은 태양은 수수밭 가운데서 반쯤 솟고 반쯤 잠겼다가 천천히 솟아 요동 벌판을 둥그렇게 감싼다. 땅 위를 오가는 말과 수레, 말 없는 나무와 집들은 부질없이 태양 가운데로 잠겨 들어간다.”
네 글자 힘차고 멋있게 완성했으나…
이날 연암은 변방의 고을을 지나면서 가끔 상점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그 의미를 추정해 보았다.
“상인들이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씨가 가을 서릿발처럼 깨끗하고, 하얀 눈보다도 희다는 것을 스스로 과시하기 위해서 써 붙인 글일 거야!”
마침 신민둔의 어느 전당포에 들른 연암은 주인으로부터 그림과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흔쾌히 수락하고는 왼쪽에서부터 ‘설’ 자를 쓰기 시작했을 때 지켜보던 주인은 물론 함께 있던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새’ 자를 쓰자, 일부는 좋다고 하나 주인은 안색이 바뀌며 처음 ‘설’ 자를 썼을 때와 같은 감탄사를 내뱉지 않는다.
연암은 자주 써보지 않은 글자이므로 그러려니 하고, 단숨에 ‘상’ 자와 ‘기’ 자를 휘갈겨 썼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네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글이라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젓는 것 아닌가? 불쾌하여 전당포를 나온 연암은 심양 골동품 가게에서 만났던 따듯한 상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8월 13일 연암은 백기보를 출발해서 40㎞를 이동해 저녁에 소흑산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는 비녀·귀걸이 등 여성 장신구를 파는 만취당에 들어갔다. 반갑게 맞아주는 장사꾼들과 몇 마디를 나누는 동안,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잠시 후 주인이 글씨를 써달라고 종이를 내놓자, 연암은 어제 전당포에서의 불쾌함을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점의 현판을 써주겠다며 ‘기상새설’이란 네 글자를 힘차고 멋있게 완성했다. 그런데 모두 시큰둥한 표정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 싶어서 상점하고 상관없는 글귀냐고 묻자 주인의 대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저희는 여성의 머리 장식품을 주로 파는 가게이지, 국숫집이 아닙니다.”
그제야 연암은 ‘기상새설’이 국수의 면발이 비단처럼 고와서 서릿발과 겨룰 만하고, 흰 눈보다도 더 하얗다는 뜻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는 금세 창피를 모면할 방도를 생각해냈다. 심심풀이로 써본 것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얼버무리고는 ‘부가당(副가堂)’이라고 석 자를 다시 쓴 것이다.
부가당은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부계육가(副계六가)’에서 퍼온 것이며, ‘부’는 머리를 땋는 것, ‘계’는 비녀, ‘육’은 여섯, ‘가’는 구슬과 옥을 뜻한다. 그러니 주인과 구경꾼들은 조선 선비의 학식과 서예 솜씨에 놀라 탄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중국인 조문
연암은 이날 소흑산으로 오는 도중에 가끔 초상집들을 보고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초상집 문과 가까운 곳에서 악사들이 나지막이 연주하다가 조문객이 가까이 오면 요란하게 피리와 태평소를 불고 꽹과리를 두드려대기 때문이었다.
십강자라는 고을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 연암은 다른 두 명의 일행과 함께 상갓집으로 갔다. 그러나 요란한 연주에 놀란 일행은 도망가버리고 연암만 대문 앞으로 다가가니 상주(喪主)가 울면서 뛰어나온다. 그는 짚고 있던 대나무 막대기를 내던지고 두 번 절을 한다. 엎드릴 때는 머리가 땅에 닿고, 일어설 때는 발을 구르며 눈물을 쏟는다.
상주가 떠들썩하게 애통함을 보인 후, 흰 두건을 쓴 대여섯 명이 따라 나와 연암을 안내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침 여러 차례 중국에 드나든 마부가 집 안에서 나온다. 연암이 조문하는 방법을 묻자, 그는 문 앞에서 조문한 것이니 별도로 할 필요가 없다면서, 음식이 나오거든 먹는 것이 예의라고 일러준다.
연암은 마부의 도움으로 중국의 장례 음식과 절차를 경험할 수 있었고, 한지와 돈을 부조할 수도 있었다. 초상집 근처 길가에는 때마침 조선 사절단 대표와 부대표가 가마를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이들은 연암이 뜻밖에 초상집에서 나오자 연유를 묻고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현표 주미 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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