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오랑캐 형벌의 교훈
“죄수들 눈에 두려움 있으나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고…”
형벌제도 목격담 두 차례나 기록
가혹한 형벌 남용하는
시대착오적인 조선 왕과 위정자 비판
가혹한 처벌보다는 관용
1780년 8월 9일 오후, 심양의 옛 궁궐을 구경한 연암은 일행을 찾아 술집으로 갔다. 두 곳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 다음, 도심의 골동품 상점인 예속재(藝粟齋)와 가상루(歌商樓)에 들어가 장사꾼들과 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후 거리를 배회하던 연암은 다른 관청은 모두 문이 닫혔는데, 지방법원의 정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꼭 관청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정문 앞에는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도록 울타리처럼 나무를 어긋나게 세워놓았다. 그러나 연암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가 제지하면, 외국인이라고 둘러댈 참이었다. 다행히도 막는 이가 없었다. ‘열하일기’를 보기로 하자.
“벼슬아치가 댓돌 위에 걸상을 놓고 앉아 있고, 뒤에는 손에 종이와 붓을 든 사람이 그를 모시고 서 있다. 뜰 아래에는 죄인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고, 그의 좌우에는 하급관리가 한 명씩 대나무 막대기를 땅에 짚고 서 있다. 명령하거나 받드는 소리 없이 벼슬아치가 죄인에게 순한 말투로 꾸짖고 타이른다.
이윽고 “쳐라!”라는 호통이 떨어지자, 하급관리 하나가 손에 든 대나무 막대기를 내던진다. 그리고 죄인에게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뺨을 네다섯 차례 때리더니, 막대기를 집어 들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죄를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편하기로서니 따귀 때리는 형벌이 있다는 소리는 예전에 들은 적이 없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이날 오전에도 연암은 심양으로 오는 길에서 수레를 타고 가는 청나라 죄수들을 보았다.
“죄수 일곱 명이 수레에 탔는데, 모두 붉은 옷을 입었다. 그들의 어깨와 등 그리고 목은 쇠사슬로 감겼으며, 사슬의 한쪽 끝은 손에, 또 다른 한쪽 끝은 발에 결박되었다. 사형수들인데 감형을 받아 헤이룽 강 근처로 귀양 가는 것이라고 한다. 죄수들의 입과 눈에서 두려움은 엿볼 수 있었으나,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서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연암이 이날 청나라의 형벌제도 목격담을 두 차례나 기록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조선의 국왕과 위정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명나라는 구국의 영웅들을 능지처참하는 가혹한 형벌을 남용함으로써 패망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명나라를 떠받드는 우리는 불온서적을 소지했다는 하찮은 죄만으로도 선량한 백성들의 목을 자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오랑캐라고 부르는 청나라의 법 집행은 이렇게 관대하다!’
연암이 검은 용을 그린 의미
심양에서 2박3일간 체류하는 동안 연암은 생면부지의 장사꾼들과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글로 의견을 나눴다. 그 내용이 ‘열하일기’에 ‘속재필담(粟齋筆談)’과 ‘상루필담(商樓筆談)’이라는 소제목으로 실렸다.
‘속재필담’은 심양에 도착하던 8월 9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예속재’에서 10여 명의 중국인과 글로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필담이 가능했던 중국인은 네 사람뿐이었다. 예속재 주인 전사가(28세), 글 읽는 솜씨가 낭랑한 이구몽(38세), 부인 셋에 아들 여덟을 둔 비치(34세), 여러 권의 책을 펴낸 배관(46세)이었는데, 배관을 빼고는 다들 연암(43세)보다 젊었다.
심양에 와서 장사하는 중국 북부·남부·중부지역 출신 평민들과의 만남은 연암에게 유쾌했다. 중국인도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조선 참선비의 인품과 학식에 반해버렸다. 자기소개로 시작된 대화는 공부 방법으로 이어졌는데, 글을 외우기만 하는 중국보다는 소리와 뜻을 함께 배우는 조선의 방법이 낫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전사가가 밤 10시쯤 음식과 술을 장만해 들어오자 화제는 골동품으로 옮아갔다. 그는 연암에게 중국 골동품의 진품과 위작을 구별하는 감식안을 강조했다. 밤샘 대화 후 8월 10일 오전 다시 예속재를 찾은 연암에게 전씨는 자기 상점의 진열품이 거의 위작임을 털어놓았다. 또한, 중국 골동품 목록을 정리해 주기로 하고, 서로 헤어지던 8월 11일 아침 약속을 지켰다.
‘상루필담’은 8월 10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가상루’라는 골동품 상점에서의 필담 내용이다. 주인은 배관이다. 참석자는 전날 밤 예속재에 모였던 인물과 거의 같았으며, 22세의 청년 장사꾼 한 명이 추가됐다.
중국인들이 서로 종이와 붓을 내놓고 서화(書畵)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연암은 술 한 잔에 한 장씩 종횡무진 붓을 움직였다. 먹이 진하고 붓이 부드러워 자신도 놀랄 만큼 글씨가 잘 써지고, 늙은 소나무와 기괴한 모양의 돌도 멋들어지게 그렸다. 그렇지만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그린 검은 용이었다.
“나는 시커먼 구름과 몰려드는 소낙비를 배경으로 흑룡(黑龍) 한 마리를 그렸다. 목털은 빳빳이 서고, 등 비늘은 순서 없이 붙었으며, 발톱이 얼굴보다 크고, 코가 뿔보다 더 긴 용을 보고 모두가 크게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암이 흑룡 그림을 촛불로 태워버리려고 하자, 참석자 하나가 그림을 빼앗아 품속에 간직한다. 이에 배관은 용 중에서 등에 불을 짊어진 용(火龍: 화룡)이 가장 독하다는 사실을 1743년의 가뭄을 예로 들어 장광설을 푼 다음, 하마터면 용 그림이 불타서 만주 전체에 큰 가뭄이 들 뻔했는데 다행이라며 안도한다.
그러자 조선의 석학 연암은 수준 높게 대꾸했다.
“화룡의 본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북두칠성을 뜻하는 ‘강철(강鐵)’입니다. ‘강철이 지난 곳은 가을도 봄이 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는데, 이는 가뭄으로 흉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일을 꾸미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때를 ‘강철의 가을’이라고 부릅니다.”
연암은 제자인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지적했듯이 심양이 발해의 영토였음을 회고하며 흑룡을 그리지 않았을까?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후인 698년 ‘대진국(大震國: 발해)’을 세웠다. 그런데 ‘대진’은 큰 벼락 혹은 큰 용을 의미하며 북두칠성처럼 비와 물의 신(神)으로 섬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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