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슬프다! 웅정필·원숭환 장군의 죽음…”명나라, 당파 싸움으로 구국영웅 능지처참 … 후세에 경계

입력 2016. 04. 2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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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


연암, ‘구요동기’ 다섯 쪽이나 할애

옛 요동성 청나라에 함락 과정 소개

‘외적보다 내부의 적 경계’ 일깨워

 

 


명나라의 참선비 원숭환 장군.

 



구요동기’ 요양의 역사를 주로 다뤄

1780년 8월 7일 요동 벌판에서 ‘참 좋은 울음터(好哭場: 호곡장)!’라는 설법을 펼친 연암 박지원은 말을 빨리 몰아 우리 선조가 집단으로 묻혀 있다는 고려총을 지나 요양(遼陽: 현재의 랴오양)에 도착했다.

요양은 책문 인근의 봉황성보다 열 배나 번화하고 부유한 고을이었다. 가는 곳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연암은 도둑들이 많은 곳이라는 소문을 실감했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그곳의 화려함보다는 ‘구요동기(舊遼東記)’라는 소제목으로 요양의 역사를 주로 다뤘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요양이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였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 당파싸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후세에 경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요동성은 한나라 때 양평(襄平)과 요양 등 두 개의 현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이었다. 한나라 이전에는 진나라 땅이었고 요동으로 불렸으며, 진나라 멸망 후에 위만조선에 편입되었다. 한나라 말기에 천하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공손도라는 자가 차지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고구려 영토였다.

요나라 때는 이곳이 남경이었고, 금나라 때는 동경이었다. 이곳에 원나라는 요양행성을 두었고, 명나라는 정료위를 두었다. 청나라는 요양을 주(州)로 승격시켰으며, 옛 성을 8㎞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신요양(新遼陽)으로 부르고, 원래 성이 있던 곳을 구요동(구요양)이라고 부른다.”

연암은 이날 구요양으로 들어갔다가 서쪽 문으로 나와서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들른 다음, 백탑과 그 남쪽의 옛 절터인 광우사를 구경했다. 그리고 다시 구요양으로 돌아와서 태자하라는 강을 건너 신요양의 영수사에서 숙박했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많은 연행록의 저자들은 요양이 우리의 옛 영토임을 분명히 했으며, 특히 양평(襄平)이라는 지명을 언급함으로써 은연중에 요동에도 평양(平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누르하치(청 태조).



우선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



또한 연암은 ‘구요동기’에 다섯 쪽이나 할애해 옛 요동성이 청나라군에 함락되어 헐리는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진정한 국방이란 외부의 적과 싸우기 전에 우선 내부의 적을 경계하는 것임을 독자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슬프다! 명나라 황실이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써야 할 사람과 버려야 할 사람을 거꾸로 선택하고, 누가 공이 있고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분명하게 가리지 못한 데 있다. 웅정필과 원숭환 같은 인물의 죽음을 보노라면 만리장성을 제 손으로 허물어버린 것과 다름없으니, 어찌 후세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웅정필은 명나라 군대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청 태조)가 이끄는 후금군에 참패한 후,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수립했던 인물이다. 그것은 (1) 산해관 지역을 굳건히 방어하고 (2) 수군(水軍)을 충분히 활용하며 (3) 조선의 군사지원으로 후금을 배후에서 공략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 전략을 수용하기 힘들었다. 사르후 전투에 1만3000명의 지원군을 보냈다가 5000명이 전사하는 끔찍한 피해를 보았으니 말이다. 더욱이 웅정필은 당쟁에 휘말린 명나라 내부 사정으로 전략을 제대로 구사해 보지도 못한 채, 패전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목이 잘렸다.

원숭환은 제갈량과 비교될 만큼 찬사를 받았던 명나라의 참선비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명나라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던 해인 1619년에 늦깎이(35세)로 과거에 합격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626년 원숭환은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줬다.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대포(홍이포)로 후금군을 격파했으며, 누르하치는 부상 후유증으로 그해 말 사망했다. 1627년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청 태종)의 공격도 격퇴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홍타이지의 간계에 속아서 구국의 영웅인 원숭환을 능지처참시켰다.



요양의 백탑 구경하고 ‘요동백탑기’ 남겨

8월 7일 연암은 뙤약볕 속에 요양의 관광명소인 백탑(白塔)을 구경하고, ‘열하일기’에 ‘요동백탑기’를 남겼다.

“이 흰색 탑은 13층이고, 층마다 8각형이며, 높이는 70인(인·1인=1.82m)이다. 전해 오는 얘기로는 당나라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군사를 인솔해 고구려를 침략할 때 쌓은 탑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정령위라는 신선이 학을 타고 요동에 돌아와 보니 옛 성곽과 사람의 흔적이 없어져 그 위에서 슬피 울며 노래 부르던 화표주(華表柱: 무덤에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라고 하나, 이는 잘못된 얘기다. (중략)

요동은 왼편에 푸른 바다를 끼고 있으며, 앞은 거침없는 벌판이 천 리나 펼쳐진다. 백탑은 요동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느낌을 자아낸다. 꼭대기에는 구리 북 세 개가 놓여 있고, 각층에는 처마의 네 귀퉁이에 물통만 한 큰 풍경(風磬)이 달려서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경 소리가 요동 벌판에 널리 울려 퍼진다.”

연암은 백탑의 높이가 약 127m이고, 그 명칭도 우리나라 천민들이 부르기 쉽게 지은 것으로 알았으나, 실제 높이는 70m이며, 예나 지금이나 백탑으로 불린다. 나아가 그는 백탑이 12세기 후반에 세워졌는데도 다른 연행록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7세기 중반에 당나라의 울지경덕이 만든 것으로 인식했다.

왜 우리 선비들은 백탑을 울지경덕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었을까? ‘이규태의 신 열하일기’는 울지경덕이 한족(漢族)이 아닌 귀화인이며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을 극구 말렸다는 중국 측의 기록, 을지문덕 장군과 유사한 이름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고구려인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제기했다. 나름대로 수긍할 만한 추정이지만, 다른 의문들도 가져볼 만하다.

요양이 고조선과 군사 강국인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었다면, 현존하는 백탑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우리 민족이 세웠던 전승탑 혹은 위령탑은 아니었을까? 울지경덕이 세웠다는 탑이 고구려 침략 중에 전사한 당나라군 묘지의 화표주는 아니었을까?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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