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부에게 배우다
소에 ‘인간은 평등하다’ 신념
노비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마부 ‘득룡’ 이야기 상세 기술
“중국어·외교 능력 탁월” 평가
‘국익 위해 헌신했던 사람은
양반 아닌 천대받던 인물’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듯
천한 사람들과 어울리다
연암 박지원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몸소 실천했던 선각자 중 하나였다. 그가 중국을 방문하기 몇 해 전 한여름의 일이다. 제자인 이서구가 예고 없이 연암의 집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스승이 사흘이나 식사도 못 하고, 옷차림도 엉망인 채 방문턱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행랑채에 사는 천한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양반집 자제로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한 이서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연암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열하일기’에는 이렇게 양반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에피소드가 허다하다.
이국에서의 첫날 밤을 구련성에서 야영으로 지샌 연암에게 1780년 7월 26일 아침은 상쾌하지 못했다. 밤비로 옷과 침구가 젖었고, 중국에 건넬 토산물이 도착하지 않아 사절단 일행이 구련성에서 하루를 더 지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연암이 무료한 하루를 어떻게 지낼까 궁리하고 있는데, 마침 어의(御醫)의 마부인 대종이 술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연암은 그와 함께 시냇가로 가서 술을 마시고 말몰이꾼들과 낚시를 즐겼다. 대종은 평안북도 선천군의 노비 신분이었다.
“마부들이 다투어 낚시질을 하기에, 나도 취한 김에 낚싯대 하나를 빌려 조그만 고기 두 마리를 낚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걸려들다니! 이곳 물고기가 낚시를 피하기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이리라.”
말몰이꾼에게 들은 이야기
7월 27일 날이 밝자 사절단은 구련성에서 12㎞쯤 떨어진 금석산(金石山)으로 향했다. 안개를 헤치고 길을 떠나던 이날 아침, 연암은 또다시 천한 신분인 말몰이꾼들의 길동무가 되었다.
그 계기는 수석통역사의 마부인 득룡이 안개 속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금석산을 가리키며 “저기가 강세작(康世爵)이 숨었던 곳이오”라고 말문을 연 데서 비롯되었다. 연암은 득룡이 풀어놓은,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사람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열하일기’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작의 할아버지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명나라 병사로 참전했다가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1618년 청나라군과의 전투 중에 화살을 맞아 사망했는데, 이때 18세의 세작은 현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당시 요동에는 조선의 군대가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서 참전하고 있었는데, 세작은 조선군의 병영으로 도망쳤다. 얼마 후 조선군이 청나라군에 항복했을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세작은 다시 명나라 군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기습으로 부상을 당하고, 명나라군의 전투력에 실망한 세작은 조선으로 피란하기로 결심했다.
요동의 금석산에 숨어서 갖은 고생을 하며 2개월을 버틴 후 그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했다.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의 여러 마을로 떠돌다가 회령에 정착해서 조선 여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80세가 넘어서 죽었다.”
박세당과 남구만이 만난 강세작
‘열하일기’에는 세작이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 득룡의 조상 집에 살면서 조상들은 중국어를 배우고 세작은 조선어를 익혔으며, 득룡이 중국어를 잘하는 것도 가문의 전통이라고 소개됐다.
나아가 득룡이 14세부터 40년 동안 서른 번이나 중국에 드나들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고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조선사절단의 필수요원이라고 기록돼 있다. 조선의 조정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미리 득룡의 가족을 감금해 그가 도피하지 못하도록 막고, 그에게 명예직이지만 가선대부라는 높은 관직을 주어서 그를 회유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연암이 강세작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이날 득룡에게 듣고 처음 알았을까? 그렇지 않다. 강세작은 ‘열하일기’가 집필되기 훨씬 전에 연암의 가문과 인연이 있던 두 사람에 의해 세상에 널리 소개되었다. 박세당(朴世堂·1629∼1703)과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그들이다.
박세당은 연암과 같은 반남 박씨이며, 장원급제자다.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국민 생활 개선에는 아랑곳 않고 무위도식하는 양반들을 ‘좀벌레’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참선비였다. 1672년 함경북도 군사책임자로 일할 때 그는 강세작을 만났다. 18세기 초에 발간된 그의 문집 ‘서계집’에는 조선에 온 이후 강세작의 생활과 언행이 주로 소개됐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로 우리에게 친숙한 남구만은 박세당의 처남이며 과거에 합격하고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이다. 일찍 부모를 잃은 박세당이 남구만의 누나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면서 둘은 가까워졌다. 남구만이 강세작을 만난 것은 함경도 관찰사로 일하던 1674년이었다. 18세기 초 발간된 그의 문집 ‘약천집’에는 조선에 오기 이전 강세작의 활동이 주로 소개됐다.
득룡을 통한 폭로
강세작과 그 후손에 관한 언급은 ‘서계집’과 ‘약천집’ 외에도 18세기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다수의 책에 등장한다. 또한, 박세당과 남구만의 기록을 보면, 강세작은 득룡 조상의 집에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득룡의 중국어 실력은 강세작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연암이 강세작 얘기를 득룡의 입을 빌려 전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부각한 이유가 무엇일까?
‘열하일기’에는 득룡이 중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가진 인물로도 묘사됐다. 즉, 기상천외의 행동으로 청나라 관헌에게 겁을 주어 그들의 횡포를 사전에 막고, 처음 만나는 몽골 왕과 손을 맞잡고 담소한다. 또한, 연암에게 외국의 귀빈들과 사귀는 노하우를 전수하지만, 연암은 처음이라 쑥스럽기도 하고 중국어가 서툴러서 회피한다.
연암은 득룡이란 마부를 통해서 청나라 방문 중에 당당하게 할 말을 다하고 진짜로 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은 자기처럼 무기력한 양반이 아니라 조선에서 천대받는 인물이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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