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압록강 건너며 도를 논하다
경계에 서서 최선의 방법으로
나랏일 처리하는 사람이 도를 제대로 아는 인물
동양의 유학과 고전·기하학 서양화·불교 등 인용하면서
조선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강연
압록강을 배로 건너다
1780년 7월 25일 조선 사절단 대표와 부대표는 의주 성문을 나와서 배가 출발하는 곳인 압록강변의 구룡정으로 향했다. 연암 박지원도 이들의 뒤를 따랐다.
구룡정 나루에 도착하니 의주부윤과 사절단의 총무격인 서장관이 벌써 나와서 출국심사 및 세관검사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사람은 본적·성명·거주지·나이·수염과 흉터 유무·신체의 길이를 일일이 기재하고, 말은 털의 빛깔을 적는다. 반출금지 품목은 황금·진주·인삼 등이다. 군인이나 통역관은 보따리를 풀어보지만, 마부나 하인들은 웃옷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내리도록 해서 훑어본다.
검사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 세 개의 깃발로 문을 구분해 놓고, 첫 번째 깃발에서 반출금지품을 소지한 것이 밝혀지면 곤장을 맞고 물건은 몰수되며, 두 번째에서 걸리면 귀양을 가게 되고, 세 번째에서 발각되면 목이 잘릴 정도로 법이 가혹하다.
세관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절단 대표 등 귀빈들은 구룡정에서 차와 술과 음식을 대접받으며, 기생들의 ‘배따라기’ 노래와 검무놀이를 감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날은 강을 건너기에 바빠서 그러한 음식이나 여흥에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다.
준비된 배는 다섯 척이다. 우두머리 마부가 출항을 아뢰는 소리를 마치기도 전에 사공들은 삿대를 물에 넣는다.
물살이 빨라 위험이 느껴질 정도지만, 사공들은 일제히 뱃노래를 부르며 능숙하게 배를 젓는다. 배는 날듯이 질주하고, 연암의 눈에는 어느덧 구룡정 나루의 모래사장에 아직도 서 있는 전송객들이 마치 콩알처럼 아득히 멀리 보인다.
배 안에서 도를 설파하다
이때 배 안에서 연암이 수석통역관에게 뜬금없이 묻는다.
“당신은 도(道)가 무엇인지 아시오?”
뜻밖의 질문에 통역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얘기냐고 반문한다.
연암은 도란 “진리를 깨달은 경지(彼岸: 피안)”라며, 연설을 시작한다.
“이 강은 저쪽과 이쪽의 경계(境界)가 서로 맞닿은 곳에 있으니, 우리는 언덕이 아니면 강물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의 올바른 도는 저 언덕과 이 강물의 사이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도를 다른 데서 구할 게 아니라, 바로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처신에서 찾으면 됩니다.”
“중국의 고전 ‘서경’에는 사람의 마음은 탐욕이 커져만 가고, 하늘이 내린 착한 심성은 희미해져만 가니, 마음을 맑게 하고 하나로 모아서 진심으로 중용을 지키라고 적혀 있소이다. 기하학을 발달시킨 서양인들은 그림을 그릴 때 경계의 미묘함을 하나의 선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여 명암으로 처리한답니다. 불교에서는 경계를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곳이라고 말하고요.”
이어서 연암은 결론을 말한다.
“따라서 경계에 있으면서 최선의 방법으로 나랏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도를 제대로 아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정(鄭)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이야말로 그런 능력을 갖췄던 인물이지요.”
연암은 동양의 유학과 고전, 기하학과 서양화, 불교 등을 인용하면서 수석통역관을 비롯해 나룻배의 승객들에게 조선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짤막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강연을 했다.
선상(船上) 강연이 주는 교훈
도대체 연암은 기하학과 서양화의 연관성을 어떻게 알았을까?
연암의 훌륭한 강연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지난주 우리는 날카로운 칼 대신에 지필묵을 준비해서 청나라 건륭제를 만나러 떠났던 연암의 나라 사랑을 배웠다.
오늘은 연암의 선상 강연에 담긴 궁금증과 나라 사랑의 교훈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연암은 홍대용과 유금처럼 기하학 등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홍대용은 ‘주해수용’이라는 수학책을 펴내면서 유클리드 기하학 중 일부를 소개했으며, 유금은 호를 ‘기하’로 지을 정도로 기하학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연암은 이기득이라는 12세 소년에게 동양 고전을 가르치면서, 융통성을 키워주기 위해 수학도 공부하도록 했다. 소년은 채 1년도 안 돼 수학에 통달했으며, 당시 판서 벼슬에 있던 수학의 대가 서호수의 부름을 받을 만큼 천재였다. 이기득이 20대 초반에 결핵으로 사망하자, 연암은 그가 지은 책을 늘 곁에 두고 아꼈다고 한다.
기하원본, 연암도 읽었을 듯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은 기원전 3세기에 집필된 책인데, 이 책의 한문번역본은 17세기 초에 중국에서 나왔다.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명나라의 선구적인 정치인 서광계가 공동으로 펴낸 ‘기하원본(幾何原本)’이 그것이다.
주목할 것은 마테오 리치가 ‘기하원본’의 서문에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에는 없는 서양화 기법을 소개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원근법과 명암의 대비를 통해서 입체감을 살렸던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와 같은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기법이 그것이다.
‘기하원본’은 17세기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됐다. 이익(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 그 책의 서문을 소개하고 서양화의 기법에 대해서 언급했다.
연암도 ‘기하원본’을 읽었음이 틀림없다. ‘열하일기’에 실린 연경 천주당의 서양 인물화에 대한 그의 감상평이 이를 증명해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귀·눈·코·입이 맞닿는 곳과 머리카락·살결의 사이가 희미하게 구분되어 있다.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음양이 서로 어우러져 밝고 어두운 부분이 저절로 드러나서 마치 숨 쉬고 꿈틀거리는 듯하다.”
연암이 도를 알았던 인물로 꼽은 정나라의 자산은 본명이 공손교(公孫僑)다. 그는 기원전 6세기에 약소국인 정나라가 북방의 강국 진나라와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사이에서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를 누리도록 도모했던 정치와 외교의 달인이다.
경계인으로서의 지혜로운 공손교의 처신은 연암이 살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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