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비장한 각오로 압록강을 바라보다
“왼쪽 주머니엔 벼루 넣고
오른쪽 주머니엔 종이·붓 넣어…”
상대 이길 수 있는
정보 수집 필수무기 먼저 챙기며
국경 넘기 전 마음 다잡아
여행길에 지필묵을 챙겨
‘열하일기’는 1780년 7월 25일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시작된다. 연암은 우선 장마로 강물이 크게 불어서 나무와 돌이 검푸른 흙탕물에 떠내려오는 압록강의 장관과 그 발원지인 백두산을 중국 역사책들을 인용해 소개한다.
조선 사절단은 강을 건너기 전에 중국에 보낼 토산물이 도착할 때까지 열흘 동안 국경도시 의주에서 기다렸다. 그들이 머물렀던 곳은 의주의 용만관(龍灣館)이다. 이곳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의 별궁이다. 용만관 북쪽에는 선조가 압록강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통군정(統軍亭)이 있다.
1627년과 1636년에는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침공해 왔다. 1637년 조선은 항복했고, 조선의 두 왕자가 압록강을 건너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로부터 143년 후, 조선 사절단이 철천지원수 국가의 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압록강을 건널 참이었다. 물살이 세어 위험하니 며칠 미루자는 건의도 있었지만, 사절단 대표는 예정대로 강을 건너기로 했다.
연암은 아침 식사 후 남보다 먼저 출발했다. 흰 정수리, 쭝긋한 두 귀,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날씬한 정강이, 높은 발굽을 가져서 만 리 길이라도 달릴 것 같은 자줏빛 준마를 타고! ‘열하일기’에는 연암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됐다.
“마부인 창대는 앞에서 말을 몰고, 하인 장복은 봇짐을 메고 뒤따른다. 말안장 양쪽에는 주머니를 하나씩 달았는데,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개, 조그만 공책 네 권 그리고 각 지역의 방향과 거리를 적은 좌표를 넣었다.”
연암은 필기구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고 기록으로 남긴 참 별난 인물이다. 왜 그랬을까? 곧 설명하겠지만, 그것은 청나라를 여행하는 그에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무사한 여행을 기원하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연암은 말을 급히 몰아 성문 앞에 내려서 누각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창대와 장복이 술병을 들고 나타났다. 국경을 넘어가면 조선의 화폐가 소용이 없으니 남은 돈으로 술을 사 온 것이다. 연암은 술을 못한다는 둘을 제쳐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의외의 행동을 한다.
“술 한 잔을 누각의 첫 기둥에 뿌리며 나 자신이 이번 여행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었다. 다시 한 잔을 부어 다른 기둥에 뿌리며 창대와 장복을 위해서 빌었다. 그리고 병을 흔들어 보니 아직 몇 잔이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리게 하고 말을 위해서 빌었다.”
당시 중국 여행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여름에는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겨울에는 죽는 자가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공식사절단의 일원이라면 사정이 달랐지만, 마부·하인·가마꾼 등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땅에 묻혔다. 다행히 사절단이 중국에서 돌아와 임금에게 귀국보고 한 것을 보면 인명 사고는 없었던 것 같다.
“저희 일행은 폭염과 큰비를 무릅쓰고 중국에 갔다가 아무 탈 없이 돌아왔습니다. 이는 모두 임금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총칼보다 귀중한 상대의 정보
연암은 생전에 ‘열하일기’의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애독자조차 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기이한 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적어놓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데 대해 개탄했다고 한다. 그런 연암의 탄식은 오늘에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열하일기’의 첫째 날 기록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특히 연암이 치욕의 역사가 흐르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 성문 누각에서 제자인 유득공의 시를 몇 번 읊조리고, 옛날 중국 자객의 의로운 죽음을 연상하는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1778년 심양으로 향하던 유득공은 “붉은 누각에서 어여쁜 임과 이별하고, 가을 찬 바람 맞으며 변방으로 향하누나. 피리와 북소리 울리는 아름다운 배는 소식이 없으니, 제일의 고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릴밖에”라는 시를 지었다. 연암은 오지도 않을 배를 기다리는 시라면서 크게 웃고는 문득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비운의 자객 형가(荊軻)를 떠올린다.
형가는 기원전 3세기에 위나라에 살던 검객이다. 위나라가 진나라에 망하자 그는 연나라로 갔다. 당시 연나라 태자는 진나라 황제(이하 진시황) 암살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형가가 적임자라는 정보를 얻었다.
태자는 그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형가는 진시황을 죽이려면 우선 그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므로 두 가지 미끼를 준비했다. 하나는 진나라에서 연나라로 망명한 장군의 목이고, 또 하나는 비옥한 땅이었다. 다만, 땅은 갖고 갈 수 없으므로 두루마리 지도를 마련하고 여기에 비수를 숨겼다.
그러나 형가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동행할 사람을 기다린다며 차일피일 떠나지 않자, 태자는 다른 자객을 먼저 보내겠다고 한다. 마지못해 낯선 자객과 함께 떠나던 날, 형가는 친구인 고점리가 연주하는 악기 반주에 맞춰 역수(易水)라는 강을 건너는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쓸쓸히 불고, 역수 강물은 차갑구나.
한 번 떠나면, 대장부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호랑이굴 더듬어 진시황 궁으로 들어가며,
하늘 향해 숨 내쉬니, 흰 무지개 해를 가리네.
흰 무지개가 해를 가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후의 암시였다. 결국, 형가는 진시황을 비수로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함께 간 자객도 참살됐다. 이어 진시황은 연나라를 침공해서 멸망시켜 버렸다.
1780년 7월 25일 압록강에서 옛 연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으로 출발하던 날, 연암은 유득공이 기다리던 배나 형가의 친구가 모두 허구(虛構)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진짜 인물이었다면, 어떤 용모였는지 알겠다고 단언했다. 그는 바로 형가처럼 칼이 아니라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정보 수집에 필요한 무기인 지필묵을 준비해서 청나라 건륭제를 만나러 떠나는 연암 자신이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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